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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31. 2016

사랑의 낭만적 특이점

Scene in the Cinema - Before Sunrise(2)

Scene in the Cinema - Before Sunrise 1편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45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는 특이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놀이공원에서 관람차는 저 혼자 우뚝 솟아 고고하게 돌아간다. 그렇게 느릿느릿 돌아가는 관람차에 올라 바라보는 세상은, 한없이 평화롭다. 적막이 뒤덮은 공간, 세상과 단절된 공간. 관람차 안은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 작은 세계 안에, 오늘 처음 만난 두 남녀가 함께 있다. 노을 지는 빈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로맨틱한 공간에서, 제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가 주저하며 횡설수설한다. 셀린느는 속내가 뻔히 보이는 그의 서투른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그녀는 말을 돌리며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다가가 목에 팔을 감으며 말한다.

나한테 키스하고 싶다는 말하려는 거야?


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진 여자인가. 제시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고, 둘은 그렇게 하나의 세계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노을 지는 빈, 관람차, 그리고 사랑하는 두 남녀. 영화에서의 이 장면은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고요한 관람차에서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던 그 순간,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명백히 사랑이었다. 영화 속 둘의 눈빛은 강렬하고 부드러웠으며, 달콤했다. 셀린느는 당당하고 매력 넘치는 여인이었고, 제시는 소년 같은 풋풋함을 지닌 남자였다.

프라터 놀이공원은 오랫동안 빈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오스트리아 황제 일가의 사냥터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1765년에 일반에 공개된 후, 각종 위락시설과 카페, 레스토랑 등이 들어서면서 빈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 둘이 탔던 프라터 대관람차는 189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놀이공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를 생각하면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 프라터는 저 둘에 비하면 훨씬 작은 규모의 놀이공원이었다. 가족단위의 방문객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겨울이라 그랬는지 다수의 놀이기구는 영업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놀이공원 입구의 대관람차 주변만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관람차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한 번에 여덟 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 탈 수 있었는데, 가족단위의 손님과 커플들이 가장 많았다. 나는 커플과 가족 사이에서 혼자 사진을 찍었다. 함께 탄 중국인 가족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긴, 동양인 남자가 핸드폰을 들고 커다란 사진기로 계속 사진을 찍고 있다면 누구라도 쳐다볼 수밖에.

둘의 사진을 찍는 과정은 그들의 로맨스만큼 달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과정이었다. 실내는 약간 소란스러웠고, 나는 혼자였다. 사무치게 외로운 빈의 저녁이었다.


그렇게 관람차에서 내린 제시와 셀린느는 다시 한번 쉴 새 없이 대화를 이어나간다.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 어린 시절 받은 상처들, 평생의 인연 등. 평소엔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쉽사리 꺼내기 힘든 대화들이 오고 간다.


우리의 어떤 이야기들은 가끔 가까운 사람에게 털어놓기엔 적절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렇게 영영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내 속에서 흐릿해져 간다.


그래서 때론 완벽한 타인에게 우리의 비밀을 털어놓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다. 나와 아무런 연고도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적은 그런 사람들. 어쩌면 낯선 곳에서의 만남은 그래서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담백하지만 짧은 시간에 밀도 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환상에 빠진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어떤 고정관념이나 배경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가슴 깊은 곳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내 옆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아니라 유럽 횡단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완벽한 타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여행지에서 마치 고해성사처럼 낯선 이에게 내 이야기를 마음껏 털어놓고 위안받는다. 여행지에서의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고해성사를 치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게 기뻐.
그리고 너의 나쁜 점을 말해줄 사람을
내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도 말이야.

어느덧 어둑해진 빈의 밤거리. 제시와 셀린느는 놀이공원에서 나와, 빈 시내의 한 카페에 자리 잡고 앉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에게 한 점쟁이가 손금을 봐주겠다며 다가온다. 셀린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손금을 봐달라고 하지만, 제시의 표정은 어딘지 떨떠름하다. 제시는 손금과 같은 점괘를 탐탁지 않아하는 눈치다.


셀린느의 손금을 보고 한참을 이야기하던 점쟁이가 사라지자, 제시는 셀린느에게 불평한다. 점쟁이들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그들은 전부 길거리로 나앉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항상 좋은 말만 하려 애쓴다고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둘의 관점차는 어떤 운명적인 만남도 두 남녀가 완벽하게 들어맞을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두 사람이 카페에 앉아 묘한 분위기의 점쟁이에게 손금을 봤던 클라이네스 카페는 여전히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유럽의 많은 도시가 그렇듯 빈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무자비한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 곳이었다. 20년 전에 영화 속에 등장한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 유럽의 매력은 이렇게 도시의 옛 모습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존중하는 유럽인들의 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카페에서 일어난 둘은 빈 시내의 작은 성당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아 암 게슈타데(Maria am Gestade)라는 이름의 이 성당은 자그마한 동네 성당의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가 찾은 날, 성당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성당에서 이야기를 나눈 뒤 빈 시내를 흐르는 도나우 강변을 따라 걷는다. 밤의 도나우 강변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지나갈 뿐이었다.

강가를 걸으며 두 사람은 가장 보통의 연애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들이 강가를 거닐며 하는 행동들, 나누는 대화들은 전부 지극히 평범한 모습들이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여자와, '나도'라고 대답하는 남자. 어쩐지 우리 연애의 데자뷰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장면의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바로 둘이 처음으로 다툰다는 점에 있다.


모든 연애에는 갈등이 있다. 연인들은 서로의 가치관을 나누며 둘만의 세계를 형성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제시와 셀린느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서 제시가 점쟁이에게 보인 태도에 관해 셀린느가 비판하자, 제시는 발끈하며 너는 그 사람에게 속은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그마한 다툼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그 다툼이 서로를 향한 감정까지 상하게 하진 않을 거란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열망과 서로를 향한 탐닉,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의견 충돌은 연인관계를 더욱 단단히 만들어주는 아교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셀린느와 제시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설사 말다툼이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왜 갈등을 나쁘다 생각하지?
갈등에서 좋은 게 많이 파생된다고.


그들이 다투던 중, 다뉴브 강가에서 시인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시인은 둘에게 시를 지어줄 테니 당신들의 인생이 흥미로워졌다고 느꼈다면 돈을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제시와 셀린느가 제시한 밀크셰이크라는 단어로 시를 지어준다. 갈등과 사랑, 그리고 시. 인생이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는 이 세 가지가 인생에 존재하기 때문일 테다. 사랑은 곧 갈등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한 편의 시이기도 하다.


Daydream delusion
Limousine Eyelash
Oh, baby with your pretty face
Drop a tear in my wineglass
Look at those big eyes
See what you mean to me
Sweet cakes and milkshakes
I am a delusion angel
I am a fantasy parade
I want you to know what I think
Don’t want you to guess anymore
You have no idea where I came from
We have no idea where we’re going
Lodged in life
Like two branches in a river
Flowing downstream
Caught in the current
I’ll carry you. You’ll carry me
That’s how it could be
Don’t you know me?
Don’t you know me by now?

그들이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선천적으로 좁힐 수 없는 의견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던 장면들. 이곳은 슈라이포겔가세(Schreyvogelgasse)라는 이름의 거리였다. 이곳은 정말 놀랍게도, 빈 시내를 무작정 걷던 중에 발견한 곳이었다. 찾을 수 있으리라곤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곳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울퉁불퉁한 길과, 네모난 창문들, 20년 전 영화 속과 똑같은 자리에 여전히 있는 쓰레기통까지. 그곳은 둘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영화 거리의 모습 그대로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셀린느는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이 되길 원하지만, 한편으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녀는 제시에게 살아가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좀 더 사랑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냐며 되묻는다. 자신의 양가적인 감정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털어놓는 그녀. 이 특이하고도 잔잔한 로맨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 남녀가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아닌,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상대에게 공감하고자 노력하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비롯한다.


사랑에 대해, 인생에 대해 빈의 어느 골목에서 진지하고도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 순간 셀린느의 입을 빌려 자신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낸다.

있잖아,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건 너나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이 세상에 마법이 존재한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거야.


셀린느가 이와 같은 대사를 하는 순간, 두 남녀의 모습은 이 영화의 정점이자 이 사랑의 낭만적 특이점이었다. 아마 셀린느와 같은 여인이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내 표정도 제시의 그것과 똑같았으리라.

둘이 서로 전화 장난을 치며 놀던 카페 슈페를(Cafe Sperl)은 시간이 부족해서 겉으로만 봤을 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유럽엔 운영한지 100년은 가볍게 넘은 카페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이 곳 역시 100년 넘도록 운영되며 빈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었다.


제시와 셀린느는 이 곳에서 친구에게 전화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친다. Ring Ring~하며 천연덕스럽게 서로에게 흠뻑 빠졌음을 상대 앞에서 말하는 두 연인이라니. 저 카페에 홀로 들어갔다면 아마 외로움에 몸서리치지 않았을까.

둘은 오페라극장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알베르티나 광장의 난간에 기대어 헤어짐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에서 몇 안 되는 빈의 랜드마크가 나온 장면이기도 했다. 둘이 함께 보낸 꿈같은 밤은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고, 아침이 밝아오면 둘은 헤어져야만 했다. 아름답고 슬픈 밤이었고, 붙잡고 싶은 밤이었다.


빈의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는 바로 국립 오페라극장이다. 유럽에서도 음악의 도시로 알려진 빈의 국립 오페라극장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밀라노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아름다운 외관뿐 아니라 내부 역시 각종 그림과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내부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오페라극장은 빈 시내 중심의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으나, 한 밤 중의 알베르티나 광장은 한산했다. 그곳엔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오페라극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여행은 짧고 현실은 길다. 낭만은 케이크처럼 달콤하지만 끝 맛은 그 당도만큼이나 텁텁하다. 둘의 만남은 여행지에서 만난 운명적 만남이었기에 꿈만 같았고, 그랬기에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끝날 짧은 만남이었다. 이 만남의 유통기한은 겨우 하루, 혹은 한 달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닥칠 이별을 생각했다.


그러나 둘은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마주하기로 한다. 작별인사를 미리 연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작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다. 그 모습은 우리가 여행이 끝난 뒤 현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답변이기도 하다. 여행은 짧고,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끝나지 않는 여행이란 세상에 없으니까. 때문에 우리는 언젠간 돌아가야 할 현실에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용기와 그리고 대담함을 갖춰야 한다.


이 두 연인은 세상 그 어떤 사람들보다 이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오지도 않은 이별의 순간을 생각하며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망치는 대신, 그날 밤을 아주 멋진 밤으로 만들기로 다짐한다. 그건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 자들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서히 아침이 밝는다. 동이 트기 전까지라는 영화 제목처럼 한정된 시간 동안 아름다운 순간을 보낸 그들이 이제는 서로에게 뜨거운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온다.

이른 아침, 빈의 골목길을 걷던 그들의 귀에 낯선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하프시코드'. 이름도 낯선 이 악기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가장 번성했던 건반악기였다. 그들은 이 클래식한 악기 소리를 배경으로 키스를 나누고, 서로를 껴안는다. 고전음악의 성지인 빈에서의 마지막을 보내는 그들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마지막이 있을까.

어느덧 다시 돌아온 알베르티나 광장 앞.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국가 영웅 알베헤르트 대공의 기마상 아래서 얼마 남지 않은 이별을 조용히 맞이한다.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서로에 대해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은 그들이지만, 이제 하룻밤의 환상 같았던 만남은 마지막을 향해 조용히 발걸음을 옮긴다.


셀린느가 자신이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순간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겨우 몇 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기차에서 내려 빈에서의 하루를 보낸 남자에게 그녀는 오래된 연인들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네가 아까 커플이 몇 년 동안 같이 살게 되면,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고, 또 상대의 습관에 싫증을 느끼게 돼서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고 했잖아.

난 정반대일 것 같아.
난 상대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될 때,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거든.

가르마는 어떻게 타는지, 이런 날은 어떤 셔츠를 입는지,
이런 상황에선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할지 알게 되면..

난 그때야 비로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교감했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은 겨우 하루에 불과했다. 사랑에 빠지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어떤 누군가와 진심으로 교감하며 오랜 시간 만남을 지속하는 일은 순간의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때는, 셀린느의 대사처럼 이 사람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됐다고 느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법 같은 일은 우리 눈앞에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가르마의 방향과 상대방의 옷 취향, 사소한 습관 같은 일상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 불현듯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마도 셀린느는, '이 순간이 끝나더라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너의 모든 것을 알아가고 싶어'라는 로맨틱한 말을 제시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둘은 처음 내렸던 빈의 기차역에서 서로를 보내준다. 기차가 떠날 때까지 서로를 놓지 못하는 두 남녀. 둘은 6개월 뒤 빈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애틋한 눈빛으로 짧은 인사를 건넨다.

'Good Bye'

' Au Revoir'


헤어짐의 인사는 그들의 만남 만큼이나 짧았다. 영화는 셀린느를 떠나보낸 제시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심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승강장을 떠나는 제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윽고 화면은 둘이 하루 동안 함께 돌아다녔던 추억의 장소들로 넘어간다. 강렬했던 밤은 지나갔고, 빈에는 어느덧 아침햇살이 내려앉고 있다. 꿈같은 영화의 아름다운 같은 엔딩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현실과 낭만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에게 여행지에서의 판타지를 선사한다. 비현실적인 로망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를 꿈꾸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언뜻 보기엔 지극히 현실적이다. 특별할 것 없는 공간에서 낯선이와 함께 대화하며 하루를 꽉 채우는 일은 현실에 발 붙인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이 영화는 우리에게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꾸게 만들었고, 수많은 청춘 남녀들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포 선라이즈>는 그렇게 여행지에서의 낭만을 일컫는 고유명사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원래 시작부터 엄청난 판타지이자, 비현실적인 낭만의 정점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오지 않은 미래를 꿈꾸고, 현실을 낭만이라는 붓으로 채색해 나가는 과정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그림이 여행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그려진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수채화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다. 비포 시리즈의 시작인 이 영화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90분 남짓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시작을 가장 현실적인 낭만으로 그려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영화는 제가 빈으로 떠난 유일한 목적이자 이유였습니다. 촉박했던 일정 탓에 하루 만에 이 모든 촬영지를 돌아다니는 일은 영화 속 그들처럼 우아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이 사진들을 다시 보며 그 순간들을 떠올린 지난 일주일은 제게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침 4월 7일에 이 영화가 재개봉을 한다고 합니다.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보며 다시금 빈에서의 추억을 떠올려봐야겠습니다.


Scene in the Cinema 시리즈


비포 선셋 -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12


냉정과 열정 사이 -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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