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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욱 Mar 28. 2016

현실과 낭만의 경계에서

Scene in the Cinema - Before Sunrise(1)

유럽 횡단 열차, 낯선 도시, 유일하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 운명적인 끌림.


여기, 온통 낭만적인 단어로 가득한 영화가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1995년작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이 영화로 '비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며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이라는 희대의 연작들을 내놓았다. 첫 영화였던 비포 선라이즈는 개봉 당시엔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후에, 각각 9년의 시간을 두고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하면서 이 시리즈는 영화사의 클래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비포 시리즈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달라지는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연인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변해가는(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한 작품이기도 하다.


비포 시리즈 3부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18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관통하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비포 선라이즈>는 시리즈의 시작이 되는 작품으로서,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도시 빈에서 가장 낭만적인 문법으로, 시리즈 중 가장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보여준다.


지난 2월 다녀온 빈에서,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이 낭만적인 영화의 발자취를 쫓아다녔다. 아래는 그 기록이다.


영화는 빠르게 지나가는 철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윽고 화면은 열차 밖의 풍경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 열차 안에서 젊은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난다. 독일 부부의 말싸움을 피해 자리를 옮긴 여자 옆엔, 미국에서 온 남자가 앉아있다.


그의 이름은 제시. 유럽에 있는 여자친구를 보러 미국에서 왔으나, 멀어진 거리만큼 멀어진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우연히 앉게 된 여자의 이름은 셀린느. 소르본 대학의 학생으로, 개강에 맞춰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잠깐의 인사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이어져, 둘의 유년시절까지 흘러간다.


바로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판타지가 집약되어있다. 기차에서 처음 만난 두 남녀가 서로에게 어떤 경계심도 갖지 않은 채 긴 시간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 우리는 이럴 때 보통 '첫 눈에 반했다'라는 표현을 쓴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맘이 맞는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떨고, 인생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나누는 일. 우리가 여행을 떠나며 기대하는 낭만은, 단순히 아름다운 도시와 유명한 랜드마크 따위가 아닌 결국 사람을 만나고 운명을 만나는 일일 테다.


기차는 어느덧 빈에 도착한다. 목적지에서 내리려는 제시. 그때, 제시는 내리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셀린느에게로 온다. 자기와 함께 빈에서 내려 함께 하루를 보내자는 제안을 하는 그. 서로에게 끌린 둘은 그렇게 빈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로맨틱한 하루를 시작한다.

그들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내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촐암스테그 다리(Zollamtssteg Bridge)였다.


이 다리는 빈의 전철을 이어주고 도심을 흐르는 다뉴브 강의 중심을 연결해주어 도시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다리 자체는 도심가에 위치해 있는 평범한 작은 다리였다.


녹색의 철제 다리는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1995년의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곳에 서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 제시와 셀린느가 서로를 향해 수줍게 웃으며 내 앞을 지나갈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저 평범한 다리에 불과하겠지만, 비포 선라이즈를 위해 떠난 여행에서마주한 평범한 다리는 낭만적인 영화 속의 한 장면이 되어주었다.

다리를 건너던 둘은 빈의 주요 교통수단인 트램에 올라탄다. 빈을 돌아다니다 보면 도시 곳곳에서 이 '트램'이라는 생소한 교통수단을 목격할 수 있는데, 기차도 아닌 버스도 아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이 트램은 때로 여행객에게 '빈에 와있다'는 사실을 가장 절실히 실감 나게 해주는 이국적인 풍경이 되어주기도 한다.


트램에 올라 탄 둘은 쉬지 않고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처음 느낀 성적인 감정과 사랑을 느껴본 것은 언제인지, 그리고 죽음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지적이라고 할 순 없지만 충분히 이성적이면서도 끈적거리지 않는 담백한 남녀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지점이자 매력적인 부분은 바로 쉼 없이 이어지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다. 두 남녀가 만나 일상적이면서도 가볍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낯선 도시의 구석구석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일. 지구 주위를 빙빙 도는 달처럼 끊임없이 겉도는 이야기가 아닌, 서로의 영혼과 가치관을 탐닉하는 대화를 나누며 주고받는 플라토닉한 사랑. 그리고 그 대화들 속에서 피어나는 서로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


이것은 우리가 여행지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꿈꾸는 낭만의 최전선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비포 선라이즈라는 영화가 언뜻 보면 현실적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너무나도 완벽한 판타지를 꿈꾸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 이건 완벽한 판타지다.


"지금 신경쓰이는게 뭐야?"

"너, 아마도?"

둘은 어느덧 트램에서 내려 ALT&NEU(알트 앤 누)라는 레코드 점으로 들어간다. 비포 선라이즈는 숨 막힐 듯이 아름다운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는다. 영화의 대부분은 빈이라는 도시의 일상이 펼쳐지는 소소한 장소를 배경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숨을 멈춘 채 바라보게 되는 때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마주했을 때가 아닌, 일상적인 장면에서다.


레코드점에 들어선 둘은 Kath Bloom이라는 가수의 음반을 집어 들고 함께 청음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멜로 영화의 모든 장면들 중 가장 소박하면서도 낭만적이다.


청음실은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서야 겨우 들어가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딱 한번 0.1초가량의 시선 교환이 있은 뒤, 둘은 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셀린느가 쳐다볼 때 제시는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거나 딴청을 하고, 셀린느 역시 제시가 쳐다볼 때면 재빨리 시선을 피한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둘의 모습 위로 Kath Bloom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둘의 이런 디테일한 감정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들의 사랑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뻔히 옆에 있음에도 눈조차 마주치기 쑥스러워 시선을 회피하는 이런 둘의 모습은, 사랑의 가장 순수한 지점과 풋풋함을 영상으로 표현해낸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러나 실제로 둘이 함께 들어간 청음실은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뒤 철거됐고, Kath Bloom의 Come Here라는 음반 역시 이 영화를 위해 따로 제작한 앨범이었다. Kath Bloom의 앨범은 영화를 촬영한 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이 레코드점에 기증했다고 한다. 특별 제작된 앨범은 액자에 보관된 채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몇몇 사소함을 제외하고, 레코드점의 내부 모습은 영화에서 본 그대로였다.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 놀라웠던 사실은, 대부분의 손님들이 영화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레코드를 사러 온 손님들이었다는 점이었다. 한눈에 봐도 영화 때문에 온 손님임을 알아본 레코드점 직원들은 나를 위해 이것저것 친절히 설명해주었고, 그 친절함에 감동한 나는 이 곳에서 클래식 음반을 하나 구입했다. Kath Bloom의 앨범을 찾아보려 했으나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ALT&NEU를 나온 제시와 셀린느는 빈 미술사 박물관 앞의 Maria-Theresien-Platz를 지나, 지하철을 타고 '이름 없는 자들의 묘지(Friedhof der Namenlosen)'으로 향한다. 묘지로 향하는 장면들은 이 영화 속에서 빈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장면들 중의 하나이기도하다.

영화에선 금방 갈 수 있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이름 없는 자들의 묘지'로 가는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빈 외곽지역에 떨어져 있는 이 곳은 트램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 한참을 가야 했다. 묘지는 빈이 다른 도시와 경계를 두고 있는 지역의 공장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도상으로는 빈 중심지보다 국제공항에서 더 가까운 곳이었다.

이렇게 험한 길과, 공장지대를 지나야 나타나는 곳.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한참을 헤매었다.

영화상에서도 설명이 나오지만, 이 곳에 묻힌 시신의 대부분은 1940년까지 도나우 강에 떠밀려온 시신들이 안치된 장소였다. 영화 속 셀린느의 설명처럼 대부분이 투신한 사람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위기는 고요하고 음산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이 묘지까지 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이 묘지가 뿜어내는 기운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온몸이 경고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 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해져 찾는 사람이 꽤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묘지에 있는 동안 이 곳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로맨틱한 영화의 촬영지와는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극 중에서 이 묘지는 셀린느가 13살 때의 기억을 회상하고, 제시와 그 추억을 나누며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를 갖는 고요하면서도 낭만적인 곳이었지만, 현실에선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장소일 뿐이었다. 외롭고 쓸쓸한 회색의 공동묘지였다.

"나는 어릴 때 말야,
내가 죽었다는 걸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를 경우엔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생각했어.
사람에게 최상과 최악의 시간을 선물하는건 바로 사람이지."

*내용이 길어지는 관계로 1,2부로 나누어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Scene in the Cinema 시리즈


비포 선셋 -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12

냉정과 열정사이 - https://brunch.co.kr/@framingtheworld/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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