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순탁 <청춘을 달리다> 소감을 가장한 턴테이블 지름 신고
앨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더라? 아마 내가 처음으로 아이팟 셔플을 샀던 2005~2006년께가 아니었나 싶다. 노래 제목을 확인할 디스플레이도 없던 아이팟 셔플. ‘뭐 어때, 전부 좋아하는 곡들인데’라는 생각으로 그냥 다짜고짜 메모리를 꽉 채워 무작정 셔플로 나오는 대로 듣고 다녔던 것이 내 음악 감상 생활을 확 바꿔놓았다.
당연히 아직도 좋아하는 뮤지션의 새 앨범이 나오면 마음이 설레어 얼른 인터넷 쇼핑몰을 찾아 헤매고, CD가 도착하기도 전에 궁금해서 또 디지털 음원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셔플로 음악을 듣는 버릇이 들다 보니 조금이라도 당시 기분에 맞지 않으면 그냥 넘기기 버튼을 누르게 되더라. 한 10년 정도 산 음반은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본 CD가 몇 개 되지 않을 거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평소에 하고 다녔던 말이 떠올라 뒷골이 찌릿해졌다.
자기계발서는 어지간하면 읽지 않으려고요.
마음 불안한 사람의 레드불이잖아요.
듣기 좋은 말만 짜 맞춘 책 읽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들은 아주 괜찮은 한 두 작가를 제외하면 자의식에 가득 찬 소위 '작가'라는 사람이, 자신이 읽은 책들 중 몇 구절과 평소 메모들을 짜깁기해 만들어놓은, 심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누더기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자기계발서 읽는 사람들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힘들 때 레드불도 좀 마실 수 있고 비타민B 주사도 맞을 수 있고 뭐 그런 거지. 사람 혹하게 해서 그런 것만 찾게 만드는 작가들과 마케터들이 나쁜 거지. 아 이야기가 잠시 등산을 했네.
어쨌건, 내가 셔플로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부분만 듣고 넘기는 게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과 뭐가 다를까? 뮤지션이 한 앨범을 만들 때는 1번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스토리를 생각하고 어떤 흐름과 메시지를 담아 작곡하고 가사를 쓰고 노래를 배열했을 텐데… 싱글이 아닌 앨범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들어주는게 팬들의 예의 아니겠나. 그러나 이미 너무 디지털과 스마트폰에 찌든 나는, 그런 인내력이 생기지를 않더라. 그렇다면 환경을 바꿔야지. 그때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음악평론가이자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인 배순탁의 ‘청춘을 달리다’.
"청춘이 머문 자리에는 언제나 음악이 있었다" 간질간질한 슬로건의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어느새 나는 음악이 좋아 어쩔 줄 몰랐던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로 돌아가 있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음악으로 엮여있고, 매 장면마다 사운드트랙이 떠오르고…
의정부 306 보충대로 들어가기 직전, 나는 리 릿나워의 <Bahia Funk>의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 <Etude>까지 모두 듣고 힘없이 부대 정문으로 들어갔다. 2005년, 진로와 취업 문제로 고민할 때는 정태춘 형의 노래 <바겐세일>을 듣고 매일 소주를 마셨었다. 30대 중반,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매달 공연과 페스티벌을 다니며 10대처럼 뛰어놀았을 때 마음속에서는 늘 킹스턴 루디스카의 <Well, You Needn`t>이 난장판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래. 내 인생의 백월은 음악들이다. 이렇게 고마운 음악을 소중하게 들으려면 현재로서 방법은 하나. 그래, LP다.
이렇게 떠들었지만 사실 나만의 턴테이블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CD 말고 LP를 열몇 장 사모은 것은 오로지 ‘예뻐서’ 였으니까. 그러나 이제 LP로 음악을 듣기로 마음먹었으니...... 뭔가를 지르는 실행 하나만큼은 5G급인 나, 바로 턴테이블을 주문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놈의 성질머리 보게? 아… 나 스피커가 없지….그래도 요즘에 만들어진 턴테이블이니 블루투스 연결도 되고, 일단 가지고 있던 포터블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보았다. 이제부터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음속에 방해요인이 생기지 않도록 환경을 깨끗이 하고 조용한 곳에 바르게 앉아 마음을 한 방향으로 하고 절대자와 대화를 나누듯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기도다. 가끔 오롯한 마음으로 기도하다 보면 뭔가 ‘응답받았다’는 울림이 가슴속에서 생기기도 하고. LP로 음악을 듣는 것은 마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과도 같다.
먼저 조심스럽게 LP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소리골에 손이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꺼내 턴테이블 플래터 위에 올려놓는다. 겉으로 보이는 소리골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낸 후 1번 트랙 시작에 바늘을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스테레오 스피커 한가운데 앉는다. CD나 디지털 음원, 스트리밍처럼 한곡을 넘긴다던가 셔플을 하는 것은 바늘을 일일이 들어 옮겨야 하기 때문에 옳지 않다. 귀찮기도 하고. 이렇게 주욱 A면을 듣다가 20여 분이 흐르면 LP를 뒤집어 줄 차례. 역시 소리골의 먼지를 털어내고 조심스레 B면 1번 트랙 시작 소리골에 바늘을 얹으면 음악이 이어진다. B면까지 모든 노래를 듣고 나면 그 뮤지션과 다시 좀 가까워진 기분까지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오랜만에 LP로 즐겨 듣던 ‘마이클 헤지스’의 <Aerial Bundaries>와 ‘핑크플로이드’의 <Darkside of the Moon>을 듣고 있자니, 처음 레코드점에 가서 좋아하는 음반을 손에 넣었을 그때가 떠올랐다. 요즘 LP가 다시 인기라고 하지만 아직은 소수의 취미. 내가 좋아하던 음반들을 구하려면 중고로도 4~5만 원은 줘야 한다. 진짜 가지고 싶던 DJ Soulscape의 첫 번째 앨범 <180g Beats>는 중고가가 20을 훌쩍 넘더라. 하지만 이왕 발을 들인 거 어떡하나. 천천히 한 장 한 장 모아보자꾸나. 아… 먼저 스피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