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지로의 홍콩식 펍/식당 '을지 장만옥'
흔히 이야기하는 X세대라면 누가 됐던 소위 ‘홍콩의 밤거리’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중학교 2학년, 처음 극장에 가서 왕조현 무대인사까지 봤던 영화가 <천녀유혼 2>였고 친구들과 모여 라면 끓여와 비디오 앞에서 모여본 영화는 <첩혈쌍웅>, <정전자> 같은 홍콩 영화였다.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면 홍콩은, 이미 꼭 가보지 않아도 누구든 조금씩은 아는 도시 정도의 위상이었다.
2020년 12월,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가 리마스터 재개봉한다는 포스터를 봤을 때 순간, 지나간 첫사랑을 다시 만난 것처럼 홍콩이 그리워 마음이 선덕선덕 해졌다. 배우자의 외도에 서글픈 소려진(장만옥)과 주모운(양조위)이 서로에게 끌리다 이별하는 이야기는 사실상 이 영화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힘든 일을 당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 그 택시 안의 따스한 조명과 이별 연습을 하자는 말에 어색해진 골목에서의 그 눅진하면서도 날 서있는 공기 등 장면 장면의 스틸컷 같은 영화를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홍콩의 밤이 더없이 그리웠…… 그런데, 나 홍콩 한 번도 홍콩에 가본 적이 없잖아.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가보지도 않은 홍콩이 그리울 때 갑자기 그 곳이 그리워지는 '가보지도 않은' 식당이 있다는 것.
‘장만옥’은 을지로 3가 인쇄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작은 식당이다. 이름이 장만옥인 만큼 가게 입구부터 홍콩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분위기. 나도 오늘 처음이라 기대기대. 안으로 들어가면 왠지 려진과 모운이 국수를 먹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역시 죄다 커플이구나…
일단 메뉴를 한번 쭉 살펴본다. 메뉴 첫 장에 새겨진 익살스런 용의 표정이 귀엽다. 이곳은 캐주얼한 식당이자 펍인 만큼 간단한 식사나 안주를 할 수 있는 일품요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뭘 고를지 몰라 아르바이트 분에게 추천을 받아 제일 잘 나가는 ‘진주 완자’와 ‘산동식 마늘쫑면’을 시켰다. 첫 잔부터 벌컥벅컥 맥주를 주문하고 싶었지만 배불러서 요리 두 가지를 못 먹을까 봐 일단 한 텀 참기로…
자리에 앉아 한 10분 기다렸을까, 금세 마늘쫑면이 모습을 보인다. 잘 비벼보니 기름과 굴소스에 잘 볶은 마늘쫑과 고기에 약간의 육수 또는 면수를 넣어 면과 볶아내 온 듯. 너무 찰기가 있지도 않지만 마늘쫑과 고기를 한 번에 집기가 쉽지 않다. 대충 떠먹어도 간이 싱겁지는 않지만 중국 사람처럼 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마늘쫑과 고기 건더기를 슥슥 입에 밀어 넣어 우걱우걱 씹으면 단맛과 짠맛, 마늘쫑의 살짝 매콤한 향과 식감이 잘 어우러진다. 이때쯤 맥주 한 잔. 첫 잔은 칭따오로 시작했다.
오, 맥주 관리 좋다. 칭따오 생맥주도 이렇게 깊은 맛이 날 수 있구나. 냉기도 적절하니 좋구만. 이때쯤 고수를 추가해 같이 비벼 먹으면 더 좋다. 고수가 유료라는 게 좀 야속하지만 이곳은 힙지로 아닌가…
면은 보통 짜장면의 2/3쯤이어서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마늘쫑과 고기가 꽤 많이 남았을 테니, 이때쯤 숟가락을 청해 남아있는 마늘쫑과 고기를 퍼서 먹어도 좋다. 이때 한 번쯤 게걸스럽게 씹어보자. 마늘쫑이 씹히며 나는 아삭한 식감이 기분이가 좋다.
시켜놓은 칭따오 맥주와 마늘쫑면을 다 비울 때쯤 진주 완자가 나왔다. 진주 완자는 돼지고기와 새우 소를 단단히 뭉친 후 찹쌀 위에 굴려 쪄낸 요리. 에어팟 하나 만 한 완자 네 알에 1만 원이 넘어 좀 비싸지 않나 싶었는데….
오, 향이 좋다. 고소한 돼지와 새우 소에 탄수화물이 같이 씹히는 맛이라니. 반쯤 깨물고 간장에 담가놓았던 고수를 한 입 같이 먹으니 간도 딱 좋고 든든하다. 두 번째 잔은 ‘상상페일에일’. 달달한 시트러스 향이 나서 생선 고기완자와 잘 어울려 시킨 건 아니고, 이게 제일 싸더라고. :-) 배가 어느 정도 차서 천천히 맥주를 차처럼 마셔보니 상큼하고 뒷맛이 개운하다.
가게 안팎 풍광과 비주얼이 마음에 꼭 들어 맥주 한두 잔 더 하다 갈라고 했는데 내 뒤로 손님들이 줄을 서있어 있는 잔만 천천히 비우고 나오긴 했지만 그것 빼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이로서 또다시 비행기표 끊지 않고 즐기는 코로나 시대의 홍콩 여행 성공! 다음번에는 둘이 와서 좀 이것저것 시켜 먹어봐야지.
P.S 1) 산동식 마늘쫑면을 맥주나 고수 없이 먹으면 살짝 느끼할 수 있는데 이때 팩 단무지를 시켰으면 좋았을 뻔했다. 아 좀 단무지나 짜샤이 정도는 그냥 줬으면 하는 마음.
P,S 2) 제일 싼 술이 6,800원인 데다 소주도 화요 등 비싼 것 밖에 없다. 맥주를 많이 마실 것 같으면 그냥 화요를 한 병 시키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