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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Feb 22. 2022

집에서 뚝딱 만든 고이꾸온 (월남쌈)

냉장고 파먹기 #2: 요리와 일상에서 의외로 중요하게 쓰이는 재능

고이꾸온(gỏi cuốn). 뭐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월남쌈이다. 냉장고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청피망 1/4조각이 모든 일이 시작이었다. 일이 일어나려니 식료품 정리 대에 바인 짱(라이스 페이퍼)과 땅콩소스도 보이네. 

순간적인 재치로 떠올려낸 달걀 지단과 콘플레이크

일단 피망을 일정한 길이로 깔끔하게 다듬고 대파 흰 줄기와 당근도 채 썰었다. 구석에 있던 자색 양배추 토막도 썰어 준비했는데 뭔가 허전한 기분. 고명이 너무 없어. 김치 냉장고 구석을 더 뒤져보니 지난번 광희동 갔을 때 사 와서 남은 햄이 있었다. 

햄에서 군내가 좀 나서 후추를 많이 넣고 볶아주었다
아... 귀찮아서 달걀물 대충 저은거 봐라

요건 차게 먹긴 그러니 후추를 뿌려 잘 볶아주었다. 그래도 허전해 무슨 고명을 추가할까 하다 달걀 지단을 부쳐 채 썰어내고 크런치한 느낌 추가하려고 콘플레이크도 등장. 음 간단하게 먹으려 했는데 점점 일이 커지네. 그래 이제 말아보자. 

크고 단단하게 마는게 이게 쉽지 않더라고

라이스 페이퍼를 더운 물에 담가 고명을 말아 얹기 시작했다. 익숙하질 않으니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크게 말아지지는 않는구나. 국수 삶은 것 같은 푹신한 고명이 좀 있으면 가능할 텐데 아…. 소면은 삶지 말아야지. 다양한 맛을 내기 위해 국수 비빔장과 케첩을 말 때마다 넣었다. 10개쯤 말아 놓으니 재료는 모두 떨어지고… 5개는 잠시 들른 동생이 먹고 나머지는 점심으로 먹기 위해 플레이팅했다. 

뭔가 베트남 카페 조식같지 않나. 그럴싸 하네...

어제 저녁도 어찌어찌 굶고 아침도 거르다 보니 좀 허기가 져서 콥셀러드 조금 추가, 마땅한 국물이 없어 계란국을 끓였다. 이 레시피는 알려달라는 사람 있음 개인적으로 알려줄게. 비밀은 아니고 뭐 워낙 별게 아니라서.


재료에 간도 별도로 안 하고 국도 심심하게 끓였는데 햄의 짠맛과 고이꾸온을 말 때 넣은 소스 덕에 간이 잘 되어서 고소한 땅콩 소스에 찍어 먹으니 간이 딱 좋다. 매일 이렇게 먹을 걸 올리고 있지만, 오랜만에 마음이 따스해지는 식사였다. 

아, 원래 월남쌈은 베트남의 생선 젓갈 소스인 ‘느억맘’에 찍어먹는데, 비슷한 맛을 내고 싶다면 까나리 젓갈 3에 맛술  1 비율로 섞어 끓인 후 차게 식혀, 고추와 양파 다진 것을 넣어 내면 그럴싸하다.  

디테일 보소

그동안 월남쌈이라는 음식을 어느 정도 무시해 왔다는 걸 고백한다. 그거 뭐 그냥 썰어서 소스랑 더운 물 같이 내면 끝인 거 아냐? 누가 ‘집들이 음식이나 파티 음식 뭘 하냐?’고 물어보면, 월남쌈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냥 간단하게 월남쌈이나 해


그런데 막상 오늘 월남쌈을 직접 하려니, 월남쌈이야말로 요리할 때 가장 중요한 재능 두 가지가 없으면 맛있게 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디테일
귀찮음을 이겨내는 끈기



먼저, 아무리 냉장고 파먹기 콘셉트의 간단한 음식이라도, 식감과 컬러를 고민하며 세심하게 재료를 준비하지 않으면 기껏 죽어라 칼질을 하고는 그냥 남는 재료를 치우는 수준의 특별할 것 없는 그저 그런 한 끼가 되어버린다. 냉장고를 뒤져보면 작은 채소 쪼가리 등 깔맞춤 재료는 엄청 많이 나오거든. 김치를 빨아 넣어도 되고 나물을 넣어도 그럴싸하니까.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충분히 훌륭한 월남쌈을 나에게, 손님에게 낼 수 있다. 

참을성과 끈기가 없었다면 이것은 까딱하면 볶음밥이 될 뻔....

또한, 각각 다른 채소와 고기 등 성질이 다른 채소를 라이스 페이퍼에 싸 먹기 쉽도록 같은 길이로 다듬어 내는 건 생각보다 되게 귀찮은 일이다. 당근, 파, 오이야 그렇다 치고 구불구불한 양배추나 피망은 영 각이 나오질 않더라고. 이것들이 길이가 일정하지 않으면 쌈도 제대로 모양이 나오지 않고 맛도 일정하지 않다. 사실 재료 다듬던 중 살짝 빡쳐서 확 잘게 다져 볶음밥으로 전환할 뻔. 


우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런 일을 그저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그저 그런 태도로 설렁설렁 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결과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그저 그런 데이터를 귀찮지만 끊기있게 손질해 그럴싸하게 바꿔내거나, 데이터를 바꿀 수가 없다면 적극적인 태도로 일을 해나가다 보면 보통 그럴싸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런데 난 이런 자기계발서스러운 생각을 왜 요리할 때 빼고는 하지 못하는가.



냉장고 파먹기: 월남쌈 편 요약

재료: 대파 흰 부분 10cm, 당근, 피망, 양배추 등 날로 먹을 수 있는 각종 채소 토막, 달걀 2알, 햄 토막이나 스팸, 게맛살 등 좀 육류 느낌 나는거 아무거나, 콘 플레이크나 부순 견과류, 조청유과나 쌀로별 등 바삭한 느낌 나는거 아무거나, 땅콩소스 또는 땅콩 버터에 마요네즈 섞은거, 라이스페이퍼 10여 장 (2인분 기준)

1. 채소와 고기 등등은 모두 적당한 길이로 채썰어 다듬어준다

2. 물을 끓여 라이스페이퍼를 담근 후 접시에 착 붙여 놓는다

3. 한 쪽 구석에 재료를 고르게 넣고 라이스페이퍼를 잘 당겨가며 말아낸다

4. 잘 말아낸 라이스페이퍼는 반으로 잘라 예쁘게 토핑한다

5.  뻣뻣할 수 있으니 간단한 국물이 있으면 곁들여도 좋다

6.  촵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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