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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Dec 31. 2020

토시코시 소바로 평냉을 먹었다

화무는 십일홍이지만 화양연화는 또 오겡끼데스까

우리가 새해 첫날 떡국을 먹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토시코시 소바’를 먹는다. 토시코시 소바(年越しそば)는 ‘해를 넘기다’라는 토시코시(年越し)와 국수(そば)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기본적으로 새해를 가늘고 길게 살자는 뜻이지만, 역으로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처럼 안 좋았던 기운을 툭툭 끊어내자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왠지 올해 안 좋은 것을 몽땅 툭툭 끊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올해 말에는 토시코시 소바를 먹도록  한다. 

신주쿠에서 먹었던 덴뿌라 소바. 토시코시 소바라고 뭐 특별한 메뉴가 아니다. 그냥 그때 먹는 소바는 다 토시코시 소바.

그런데 동네 근처에 적당한 소바집을 찾을 수가 없네. 하긴 여기가 일본도 아니고. 어차피 토시코시 소바라는 게 특별한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니라, 새해 그믐에 먹는걸 모두 토시코시 소바라 하니 그냥 비슷한 음식인 평양냉면을 먹기로 했다. 뭐 어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냉소바잖아. 

냉면은 패스트푸드와 가깝다. 주문하기 무섭게 나와버림

내가 주로 가는 것은 논현동 평양면옥. 의정부가 좀 멀긴 하지만 거긴 너무 길이 머니 패스. 주문하고 순식간에 시원한 스뎅 사발에 한가득 육수와 메밀면, 소 양지와 돼지고기 전지, 오이와 파, 계란 고명이 얹어진 듯했지만 이내 자빠져버린 평양냉면이 모습을 보인다. 요걸 만나면 당연한 의식. 일단 국물부터 한 모금 때리자. 단골이 아닌 이상 국물을 잘 리필해주지는 않는 것 같으니, 면을 다 먹으려면 완샷은 하지 말자. 솔직히 국물 한 사발 주면 그것과 기본 찬인 배추 백김치만으로 소주 한 병 때리는 진상들도 많을 거거든.

 면식 복음 1장 2절, 평양냉면에 고춧가루는 반드시 넣어야 하느니라

크으… 시원함이 목젖을 때리고 지난주 먹은 술까지 홀딱 깨는 이 느낌. 소주를 시키고 싶지만 아차… 차를 가져왔네. 정오에 대리운전까지 부르며 오바할 수는 없으니 일단 참고 면을 먹기로 한다. 식초와 겨자를 넣지 마라, 면은 가위로 자르면 안 된다 등등 면스플레인 따위는 하지 않는다. 입맛에 무슨 고저가 있다고. 다만 고추가루스플레인은 좀 하는 편. 요걸 좀 넣으면 국물이 아주 칼칼하고 깔끔함이 더해지니 꼭 한 번 처먹어볼 것.


평양면옥은 메밀 함량이 70~80% 정도 된다는데 다른 집 면보다 고소한 맛은 덜한 반면 메밀의 텁텁한 맛도 줄어들어 오히려 먹기 좋은 것 같다는 게 내 느낌적인 느낌이다. 면을 젓가락으로 집은 후 국물에 푹 담갔다가 들어 올리면서 쭉 빨아보자. 국물과 함께 들어가야 조금 더 맛있다. 

아... 평양면옥 만두는 정말 '레시피 보존 및 수정 금지 순수령' 같은 국민 청원 넣어야 함

지독히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는 자리라 만두도 좀 시켜봤다. 사 먹는 찐만두에 큰 감흥이 없는 타입이지만 평양면옥 만두는 정말 맛있다. 큼지막한 만두를 한입 콱 베어 물면, 육즙이 나오거나 그런 뭐 뻔한 흐름은 아니지만 담백하고 고소한 게 아주 저분저분한 맛이 있다. 단면을 보면 으깬 두부가 거칠게 박혀있지만 뻣뻣하지도 않다. 보통 혼자 오면 제육 반 냉면 하나, 또는 만두와 냉면을 시키는데 워낙 만두가 커서 반 정도는 먹다 싸가는 편. 


이렇게 세밑 마지막 식사도 아주 만족스럽게 한 상 했다. 2017년 겨울부터 반강제 프리선언을 한 후, 처음 몇 달은 좀 힘들었지만 조금씩 제 궤도에 오르면서 2019년까지 정말 행복한 한 해를 보냈다. 

2019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린 글. 이땐 지금처럼 될줄은 꿈에도 몰랐지

얼마나 만족도가 높았으면 작년 이맘때 이런 오만한 글을 타임라인에 싸질렀을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정신으로 무턱대고 살았는데 그 뒤 브리지 부분에 붙어있던 ‘화무는 십일홍이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전쟁통에도 애는 생기고 동토에도 꽃은 핀다고, 화양연화 같은 시절은 반드시 또다시 오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복작복작 즐길 만반의 준비는 되어있으니, 내년 한 해 또 대충대충 재밌게 살아보기로 마음먹고 한 잔 해볼란다.  


덧) 누가 보면 일본에서 한 20년 산 줄 알겠네. 니홍고오 맛타크시떼 이마센. 니혼 데 산 모 아리마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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