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자 요약: 제육 추가는 둘일때만
예전에는 ‘골목식당’에 나오는 식당에 큰 기대가 없었더랬다. 인구 유입이 변하면서 차츰 상권이 쪼그라든 골목에 있는 가게들의 문제점과 오류를 다년간 다양한 식당을 창업하며 쌓아낸 백종원의 경험을 통해 바로잡는다. 거기에 백종원의 인지도와 특유의 유머, 방송국 놈들이 편집으로 만들어낸 기승전결과 휴머니티 소스를 발라 내면 어느새 혈관에 피가 돌듯 사람들이 모이면서 방송에 출연한 가게뿐만 아니라 그 골목 상권 전체가 서서히 살아나게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골목식당에 출연한 가게들을 부러 찾지는 않았었다. 과장된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초창기에는 방송에 나온 모든 메뉴들이 백종원 식당 메뉴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 그 이후 골목식당을 유심히 보면서 뭔가 특징을 파악해 보았다.
골목식당에 출연하는 식당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1. 음식 솜씨가 뛰어나나 그 외 준비가 부족한 가게
2. 음식은 보통이지만 다른 장점이 있는 가게
3, 음식이 별로거나 서비스가 별로거나 복합적인 문제가 있는 가게
첫 번째 가게는 방송이 된 후 언제든지 찾아가도 꽤 괜찮은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서비스는 별로인지 몰라도 맛에서는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세 번째 부류의 가게는 뭔가 가기가 망설여진다. 속 깊은 사연은 잘은 모르겠지만 가끔은 고집도 세고 접객도 엉망인 사람들도 있고 가게 위생 상태가 엉망인 경우도 있을 거다. 사장이 쓸데없는 똥고집이 있는 경우도 종종 나온다. 일부러 그런 집 섭외한 것처럼…
보통 이런 가게는 하나같이 음식이 맛이 없거나 뭔가 문제가 있게 마련인데 이때 보통 백종원이 적극적으로 푸시해 소위 ‘비법’을 억지로 떠먹여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 대표야 워낙 경험이 많다 보니 어지간한 요리는 중상급으로 해내는 인물.
본인들이 날로 먹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군데군데 숙제를 만들어 넣긴 하지만 자신의 노하우를 초심자가 알아먹을 수 있도록 간소화하다 보니 특별하지는 않은 일반적인 레시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집을 굳이 가볼 필요까지는 없지. 게다가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초심을 잃고’ 원점으로 돌아가거나 원래보다 더 개판이 되는 경우를 심지어 방송에 다시 내기도 한다.
서울을 돈카츠 열풍으로 뒤집어 놓은 ‘연돈’은 첫 번째 경우. 이곳을 다녀온 뒤 골목식당 출연 가게에 관심을 조금씩 가지게 됐다. 돈카츠 맛이 이미 완벽했던 연돈은 접객과 장사 노하우를 배우고 백종원 코인 버프를 받으며 서울 돈카츠 계를 뒤집어 놓는다. 서울에서는 사람이 워낙 많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지난 2020년 5월 제주 자전거 일주 중 미친 척하고 아무 준비도 없이 그 앞에서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13시간을 뻗친 끝에 연돈 로스카츠의 맛을 보고는 백종원 대표의 안목을 믿을 수 있었다. 시부야의 ‘키치카츠’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로스카츠였달까.
여기서 확신이 안 생기는 가게는 두 번째 부류. 음식은 보통이지만 다른 장점이 있는 가게였다. 방송에서 편집해 내보내는 그 스토리들이 정말 오프라인에서도 먹힐까. 아리까리한데 시간을 낭비하자니 아까워서 그런 식당 역시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작년에 방송했던 ‘공릉동 골목’ 시즌의 ‘경복식당’은 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음식보다는 분위기와 정을 파는 집이랄까.
자리에 앉으면 한 상 크게 내어주는 ‘백반’ 스타일의 식당을 워낙 좋아하는 것도 있다. 게다가 단골의 반찬 취향까지 기억해 서비스하는 주인아주머니의 푸근한 웃음과 식당 내부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일상을 보내는 아이들이 어우러진 그 한상이 너무 궁금하더라. 아직도 유명세가 죽지 않았는지 지난 1월 말 1시쯤 찾아가니 이미 재료가 소진되었다고…. 그래서 3월에 큰 마음을 먹고, 이번에는 좀 빨리 11시 30분에 경복식당을 찾아갔다.
가게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그 앞에서 죽치고 막연히 기다릴 필요는 없다. 가게 입구 장부에 일행 대표의 이름을 써놓고 차례가 되면 주인아주머니나 딸이 나와 이름을 부를 때 들어가면 된다. 기다리지 않고 촵촵촵 먹는 백반이라 한 팀당 평균 15분 정도 걸리니 대충 가늠해 근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책을 읽고 있으면 될 듯. 내 앞엔 여덟 팀이 있었는데 난 한 시간 정도 기다렸던 듯.
백반 1인분은 6천 원, 2천 원만 추가하면 제육을 곁들인 백반이 나온다. 그런데 이 집도 고로상이 좋아할 것 같은, ‘반찬의 테마파크’ 과식 살해범이다. 배추김치, 콩나물, 봄동 무침, 오뎅 소시지 볶음, 얼갈이 나물, 콩장, 멸치볶음, 무말랭이, 양배추쌈 등 벌써 밑반찬만 열 가지. 조기는 1인당 두 마리에 오늘의 국은 육개장이다. 흑미밥이 얼마 되지 않아 보일지는 몰라도 꽉꽉 눌러퍼 한 공기 반은 되는 듯. 아, 제육을 추가했는데… 하고 바라보니 떡볶이 접시 가득 제육볶음이 담겨 나온다. 와우…… 제육은 최대한 그때 그때 볶아내는 것 같다.
특별난 맛은 아니지만 음식 하나하나가 깔끔하니 괜찮다. 반찬 하나하나 맛보며 먹다 보면 밥 반공기가 어느새 금방 사라진다. 제육볶음도 백종원에게 배워서 그런지 양념도 진하고 쫩쫩 달라붙는 맛. 이미 배가 부르지만 이건 다 비워야겠다 싶은 생각을 하는데 이미 주인아주머니가 내 앞으로 와있다.
밥 더 줘야지? 세 공기는 잡숫겠구먼.
때마침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 째잘째잘 투닥투닥 떠들더니 할머니인 주인아주머니에게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데 너무 귀여워서 내가 카드 줄 뻔. 한 시 반부터는 근처 공장 단골들이 식사하는 시간, 단골들과 주인아주머니의 대화를 ASMR 삼아 기분 좋게 밥과 반찬을 싹싹 비웠다.
앞서 음식 맛은 보통이라고 분위기를 잡은 대로, 그렇게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이런 점심 백반집의 미덕을 지킨 간간하고 착 달라붙는 밑반찬들 덕분에 그냥 백반만으로도 훌륭하다. 개인적으로 제육은 둘이 갔을 때 추가하는 걸 추천. 그릇을 다 비웠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오셔서 ‘반찬이랑 밥 더 줄까요?’ 하고 물어보는 걸 보면, 나 경복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음식으로 살해당한 게 맞는 듯. 고봉밥에 밥 반공기 추가하고, 제육볶음과 모든 밑반찬을 싹 다 비웠더니 배가 아플 정도로 불러와 그날 저녁은 가뿐히 걸러줬다.
요즘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은 흔히 이야기하는 ‘비법’을 알려주기보다 가게 사장들이 자신의 수준을 인지하고 그들의 장점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완벽히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소위 '서당개 협회'라 불리는 정인선과 김성주에게 자꾸 맛을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현재 길동 골목의 식당들을 보면 그러한 특징이 도드라지는데, 집도 가까운 만큼 세 식당 모두 한 번씩 여행 와서 맛집 찾아가듯 한 번 가봐야겠다. 정말 아쉬운게, 경복식당은 술은 팔지 않는다. 하긴 6천 원 짜리 백반 하나가지고 가열차게 돌아가는 집에서 소주 시켜서 눌러앉아 있으면 그게 뭔 민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