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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Mar 29. 2021

인천에서 주체사상의 맛을 봤다

농마국수와 인조고기밥 등 찐 북한 음식 내는 탈북자 식당 호월일가

오늘 인천 남동공단 부근에 들를 일이 있었다. ‘수도권’이라 하지만 사실 서울 강동에서 인천은 거의 가평이나 강원 급의 거리감이 있다. 서울 내에서도 여행을 떠나는데 이정도면 여행의 필요충분조건 완성. 일이 끝나고 찾아갈 식당을 스캔해 본다. 공단 근처라 뭐 딱히 먹을게 없던 중 뜬금없는 북한 음식이 검색창에 보인다. ‘농마 국수’… 2009년이었나? 첫 중국 여행이자 출장으로 베이징에 갔을 때 한식당 ‘모란봉’에서 이 메뉴를 먹어본 기억이 있다. 그땐 고기맛과 멸치맛이 나는 따끈한 국물에 말아준 것이었는데… 추억도 생각나고 해서 이번 여행지는 여기로 결정. 

이전한 호월일가의 전경. 논현동 635-1에서 637-1로 이전했다. 가까워 보여도 도보 5분 거리. 아직 검색엔 나오지 않음 주의

‘호월일가’는 할머니와 딸, 손녀 탈북자 3대가 운영하는 북한 ‘량강도’ 음식 전문점이다. 처음 시작은 인천 남동구 논현동 635-1에 있는 아파트 상가의 가게였는데 최근 여차저차한 이유로 인천 논현동 637-1에 위치한 상가로 이전 했다고 한다. 이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아직 주소가 등록되어 있지 않아 검색 신공을 총동원해 어렵게 현재 위치를 알아냈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내부. 3대가 대화하는걸 들으면 꼭 북한에 여행온 기분.

가게 내부는 아직 정리가 덜 끝났는지 어수선하지만, 남한 사람에게는 ‘억센 강원도 사투리’로 느껴질 할머니와 딸의 말투에서 ‘친지김동 위수김동’ 뻘소리로 대변되는 주체사상의 향기가 느껴진다.

아 떼로 와서 저기 있는 메뉴 싹다 시키고 싶다. 북한 떡과 식재료도 파는 모냥이다

메뉴를 보니 별별 음식이 다 있다. 모두 북한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라고. 진고기밥과 인조고기밥, 두부밥과 북한 순대, 농마국수, 농마 떡국 등 생소한 메뉴들이 당기는데 혼자 한 끼를 먹으려니 뭘 시킬지 모르겠다. 

가게 전경. 직장인 신이 반갑고 재밌네. 

고민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첨 오면 농마국수랑 인조고기밥 많이 시키지비’ 흘리듯 던지고 가신다. 인조고기밥 가격이 생각보다 세서 망설이니 어느새 다시 나타난 할머니.  ‘그거 반으로 갈라 5천원에 팔아요’ 던지고 사라진다. 역시 이제 자본주의의 뜨거운 맛을 보셨구만! 한국보다 몇 템포 늦게 한국의 드라마를 본다는 말 답게, 한참 지난 ‘직장의 신’을 틀어놓은 티비를 보고 있자니 곧 인조고기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인조고기밥 1/2. 5천원인데 생각보다 엄청 많다

인조고기는 콩깻묵으로 고기와 비슷한 식감을 내는 인조고기를 한 뼘 정도로 잘라 삶은 후 밥을 넣고 말아 고춧가루 베이스 양념을 발라먹는 북한의 스트리트 푸드다. 

정갈한 반찬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공깃밥 한그릇 뚝딱 각

인조고기와 함께 나오는 찬은 명태 조림과 얼갈이와 파가 들어가는 채소 무침, 쥐포 무침인데 하나하나 다 맛있다. 명태는 연변산을 쓰는거 같은데 따끈하면 정말 밥도둑일 듯. 인조고기밥을 한 입에 밀어넣고 반찬과 함께 씹으니 생각보다 맛이 차지다. 

밥에는 깨 빼고 특별한 양념이 되어있지는 않지만 양념 맛과 식감이 재미있다. 전형적인 한국 맛도 아닌데 또 어디서 먹어본 맛

고춧가루와 마늘을 베이스로 한 양념은 해물의 냄새가 살포시 나는걸로 보아 뭔가 멸치 육수 같은걸로 개어 낸듯. 생각보다 매콤하니 좋다. 인조고기밥을 우걱우걱 씹고 있는데 농마국수가 나왔다.  한국의 분식점이나 고깃집 냉면 비슷한 비주얼이다. 

쪽파가 들어간 꽤 시원한 고깃집 물냉면 맛이지만 또 그것과는 약간 다르다

‘농마’는 북한 말로 녹말. 녹말로 만든 국수를 말아 내다 보니 그 이름이 농마국수다. 무채와 오이. 깨 등 토핑은 한국의 고깃집  냉면과 비슷하지만 쪽파가 들어가니 또 평양냉면 느낌도나고 독특하다. 북한이나 중국 고급 식당에서는 명태회를 얹어 내기도 한다고. 

한 젓가락 들어서 클로즈업. 면이 투명한데 씹어 보면 함흥냉면 못지 않게 엄청 쫄깃하다. 보통은 고구마 전분을 사용하는데 량강도에서는 고구마 재배가 어려워 주로 감자 전분으로 국수를 내다 보니 이렇게 하얀 면이 나온다고.

 농마국수가 평양 옥류관 냉면과 가장 유사하다고 하는데 호월일가의 농마국수는 평범한 갈비집 함흥냉면 맛. 아, 맛이 없다는게 아니다. 나름 파고명도 들어가서 알싸하기도 하고 시원하게 쫄깃하게 잘 먹을 수 있다. 가격도 고작 6천원 아닌가. 함께 나오는 찬 중 쥐포 무침과 곁들여 먹으면 꽤 맛있다. 면이고 쥐포고 오래 씹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농마국수와 인조고기밥 1인분을 다 먹으면 겁나 배부르다. 정제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만남이라 그런가? 좀 아쉬워서 북한 순대 소짜를 포장해 집으로 워프해 본다. 집에서 포장을 까 저녁에 먹으려고 그릇에 담다보니 이것도 독특하다. 

익숙한 당면은 어디로 가고, 선지와 파, 마늘, 채소 등 갖은 양념을 넣고 선지에 비벼 쪄낸 밥알이 가득하다. 소스는 양념 간장. 톡 찍어서 밀어넣으니 이미 내 손은 막걸리 병을 따고 있고…. 오 이거 맛있다. 


간만에 빡세게 여행온 기분이다. 냉면, 순대 같은 고만고만한 음식이 이렇게 같고도 다른 맛을 내는 것도 그렇고, 콩고기도 아니고 깻묵으로 만든 인조고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식감인지도 처음 알았다. 인조고기를 소금물에 불린 후 양파와 고추, 당근 등 양념에 오뎅 볶음 하듯 달달 볶아 먹어도 맛있다 하는데 얼른 시도해 봐야겠다. 인천 남동공단 부근에 가시는 분들은 한 번 들러보시길. 나도 북한식 된장찌개와 진고기밥, 순두부구이, 농마떡국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 또 들러봐야겠다. 아… 오랜만에 제대로 해외여행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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