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석식 소주를 전통 소주와 대등하게 비교해도 되냐는 생각에서 피어난 단상
소주… 두 글자에 오만 상념이 스쳐 간다. 그 쓰고 단 물을 마시며 많이도 울고 또 울었다. 미친 짓도 많이 했고, 알딸딸한 채로 기타를 잡고 합주하거나 무대에 올라 (보는 사람도 나도) 꽤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소주는 뭘까?
燒酒
燒(불태울 소)에 酒(술 주). 이게 정확한 소주의 이름이다. 말마따나 술을 불로 태우는, 즉 증류로 얻어낸 게 소주라는 말이지. 그런데 요즘 우리가 마시는 ‘쏘주’ 같은 희석식 소주를 그리 불러도 될까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에 식용 알코올을 탄 다음 감미료 등을 넣은 건데, 이걸 불에 태운, 그러니까 증류한 술이라 할 수 있겠냐는 말이지. 그건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며칠 전 ‘제주서 만난 메밀의 진수, 저지면옥’에서 매제와 냉면을 안주 삼아 한라산 소주를 기울였다.
오~ 매제, 한라산 21도 시켰어? 좀 치네!~
형님, 이건 노지꺼로 마셔야 진짜지요…
이런 시덥잖은 대화를 하던 중, 매제가 문득 한마디를 던졌다.
이거 맛있는 게 기분 때문만은 아니네요!
제주산 쌀 증류식 소주 원액이 들어 있어요.
얼른 뒤 라벨을 보니, 진짜네? 그날은 그냥 기분 좋게 하하호호하며 넘어가기는 했다.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요즘 희석식 소주 제조 방법이 좀 바뀐 건가? 서울로 돌아와 하나씩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먼저 ‘진로이즈백’. 여기에는 국산 쌀로 만든 ‘주정 쌀 증류식 소주 원액’이 들어 있다. ‘새로’에도 국내산 쌀과 보리로 만든 ‘증류식 소주’ 원액이 들어 있구만, 이거. ‘처음처럼’에도 국내산 쌀로 만든 ‘쌀 증류식 소주 원액’이 들어 있기는 하다. 엥? 이런 짓을 했으면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거나 했을 텐데, 왜 조용하지?
그나저나 이거 왜 넣는 거야?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을 연출한다’는 목적으로 증류식 소주를 조금씩 섞는다고 하네. 이걸 넣으면 맛이 부드럽고 친근해진대나?
뭐 결국 소주 잘 마시게 하려고 그런 거겠지. 그러면 증류식 소주를 희석식 소주에 얼마나 넣었을래나? 뒤 라벨을 보니 소주에 꽤 이것저것 들어가기는 한다. 한번 자세히 보자고.
정제수, 주정, 쌀 증류식 소주 원액(쌀: 국산 100%),
감미료(효소처리스테비아, 에리스리톨, 토마틴)
일단 소주의 대부분이 물이니 정제된 물은 당연히 들어갈 거고… 희석식 소주에서 술 느낌을 내는 대부분은 ‘주정’일 테니까… 그다음은 증류식 소주 원액이 들어간다. 나머지는 소주에 단맛을 내는 감미료, 스테비아와 에리스리톨, 토마틴 같은 대체 당류 되시겠다. 저 세 가지를 조합해 희석식 소주의 알코올 쓴맛 등 불쾌한 느낌을 없애는 걸 거다.
그런데 증류식 소주를 얼마나 넣은 거지? ‘식품 등의 표시 기준’에 따르면 원재료명은 식품을 제조할 때 사용한 원재료를 ‘많이 사용한 순서대로 표시’해야 한댄다. 단, 2% 미만으로 들어간 원료들은 그 순서를 지키지 않고 자유롭게 표시해도 된다고 한다.
희석식 소주에 증류식 소주 원액을 넣는 것도 아마 희석식 소주의 불쾌한 맛을 가리고, 브랜드가 이야기하는 ‘부드러운 맛’을 티 내는 감미료 정도의 역할 아닐까? 그런데 ‘참이슬 프레시’나 ‘참이슬 오리지널’, ‘좋은데이’ 같은 희석식 소주는 증류식 소주를 넣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신제품 홍보 포인트를 잡기 위해 신제품에만 넣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일단, 중구난방 생각해본 내 결론은, 한국 희석식 소주를 '소주'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엄연히, 불로 증류한 주정이 들어가기는 했으니 분류로는 맞긴 하잖아? 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의 저가 리큐르, 일본의 기계식 대량 생산 소주 같은 게 큰 인기를 끄는 만큼, ‘희석식 소주’가 주류가 된 한국의 상황이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한 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일품진로 같은 증류식 소주를 술집에서 시키려면 병당 2만 원은 넘게 줘야 하니 주머니가 슬퍼진다.
단, 하지만 소주를 ‘한국 전통 술’이나 ‘깊은 맛’처럼 뭔가 고급스럽고 좋은 술로 홍보하거나, 증류식 전통 소주와 맞짱을 뜨는 건 좀 아니다 싶음… 앞으로 소주 회사들이 뭔가 좀 다른, 재미있는 홍보·마케팅을 전개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