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첩국 사이소~
대학교 2학년 때, 안동이 고향인 친구 집에 엠티 삼아 놀러 가 며칠 밭일을 도운 후 마지막 날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술상에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술이 취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미지의 소리에 잠을 깼는데, 그 소리는 이랬다.
재칩국 사이소~
누가 개그 프로그램을 틀어놨나 하며 비몽사몽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진짜 골목에서 웬 아주머니가 통을 메고 ‘재칩국 사이소’를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한 사발 들이키면 알코올 쓰레기도 벌떡 일어나 소주를 완샷 한다는 신비의 술꾼 명약. 진짜 얼른 뛰어가 한 사발 들이키고 싶었지만 ‘퍼뜩 밥 무라!’ 친구 어머니의 성화에 포기하고 짭짤한 간고등어와 시락국을 먹어야 했다. 점심 전에 서울로 올라가면서 재첩국 파는 가게를 찾아봤지만 이상하게 하나도 파는 곳이 없고… 그렇게 재첩은 기억 한구석으로 접혀 들어갔다. 그런데 며칠 전 신서유기 시즌8 놀부 엄마 규현의 먹방을 보다 기억 속에서 재첩이 다시 기어올라왔다.
영상에서 규현이 재첩 비빔밥을 슥슥 비벼서 재첩국이랑 뚝뚝 떠먹는 걸 보니 그렇게 먹고 싶더라.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서울에 재첩국 전문 식당은 대치동의 ‘할매 재첩국’ 하나뿐이다. 할매 재첩국은 1950년도 부산 구포에서부터 시작한 재첩 요리 전문점이다.
주 메뉴는 재첩 비빔밥과 재첩 덮밥 등 재첩 요리와 경상도식 회 요리를 내는 식당으로 본점은 부산 광안리라고. 신서유기 규현이 먹은 대로 먹고 싶어 사장님께 사진을 보여주니, 이렇게 먹으려면 재첩 덮밥을 시키란다.
재첩 정식이 각종 나물에 국에서 재첩 건더기를 건져내 넣어 밥을 비벼서 반찬과 함께 먹는 스타일이라면 재첩 덮밥은 나물 없이 양배추와 미나리, 깻잎, 당근 등 신선채소를 넣고 그 위에 재첩을 밥공기로 반은 넘게 얹어낸 건더기에 초장 넣고 싹싹 비벼 밑반찬과 재첩국을 곁들여 함께 먹는 그런 ‘너낌적인 너낌’. 햐… 갱상도 음식에 요 말 쓰니 챡 붙네.
모든 메뉴에 재첩국이 나오는데 여기도 재첩이 깨나 실하게 들어있다. 일단 한 숟가락 떠먹어보니 이거 (긍정적으로) 맛이 희한하니 괜찮다. 칼칼하고 시원한 맛인데 재첩이 민물조개라 또 바다 조갯국과는 묘하게 다른 맛. 내 입맛에는 후추랑 청양고추 조금 넣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밥이랑 먹으려면 이대로도 괜찮다.
보통 이렇게 맛이 진한 음식에는 슴슴한 찬이 나오게 마련인데 경상도 스타일은 강한 데는 강한 걸로 맞서나? 향긋하다 못해 바다 내음 풀풀 나는 파래 무침, 짭짤하고 시원한 봄동 겉절이, 짭짤한 고등어 김치 조림에 멸치젓과 강된장이 찬으로 나온다. 슴슴한건 계란말이와 오뎅볶음 뿐.
여기서 가장 신기한 건 ‘풀치’ 조림이다. 일하시는 분께 물어보니 풀치는 어린 갈치를 염장해 굴비처럼 말린 녀석이란다. 이 녀석, 꼭 쥐포 같은 맛인데 식감은 훨씬 부드럽고 감칠맛도 좋다. 오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재첩 덮밥과 먹으면 달착지근하니 괜찮은… 아니 좋은 맛. (사실 간절히 소주를 시키고 싶었지만 오후 한 시라 참는다.)
밥이랑 재첩을 비롯한 건더기를 썩썩 비벼 한 입 넣어본다. 음… 덜 시고 덜 단 초장에 참깨 가루를 많이 넣어서 적당히 새콤달콤하고 고소한 맛에 재첩이 꽤 많이 씹혀 식감이 재미있다. 고등어조림과 봄동 겉절이 같은 강한 맛도 은근 잘 어울리고. 찬을 이렇게 내는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입 헹굴 때는 재첩국을 한 입 떠먹으면 굿.
멸치젓은 돼지고기 먹을 때 빼곤 잘 먹지 않아 패스. 꼭 호박잎 같은 찐 케일 잎에 밥을 넣고 강된장을 조금 넣어 먹으니 별로 짜지도 않고 좋다. 이때 풀치 조림도 하나 뙇~ 건더기가 많이 들어간 덕분에 끝까지 재첩 식감이 나서 한 그릇 다 비울 때까지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아… 전날 술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잤더니 뭐랄까 썸카인드 오브 해장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재칩국 사이소’의 그리움은 충분히 해소할 만했달까. 곧 코로나가 괜찮아지면 친구들과 함께 가서 재첩 무침과 소주 한 잔 기울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