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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Dec 22. 2020

돈가스는 비벼먹는 음식입니다

먹어보지 않았으면 말도 마. 꼭 한번 도전해보길!

돈가스를 사랑한다.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사랑한다. 정갈하게 썰어져 놓인 한쪽을 겨자 푼 우스터소스에 콕 찍어 먹는 일본식 돈가스, 데미그라스 소스에 푹 적셔 먹는 왕돈가스 등 돈가스 종류를 모두 사랑한다. 오죽하면 일본에 오로지 ‘시부야에 60년 된 기가 막힌 돈가스집이 있다’는 말 때문에 도쿄로 날아간 적도 있을 정도. 

시부야 '가츠키치'에서 먹은 일본식 돈가스. 내 인생 돈가스이다. 시부야역 육교 아래 정도 위치

그중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는 왕돈가스는 여러 가지로 추억이 담긴 음식이다. 성북동 금왕 돈가스에서 돈가스를 먹으며 느긋하게 맥주를 두 병이나 마시고 보니 지갑이 없어 마침 그 집에 들어온 쌀포대와 식자재를 날라주고 얻어먹었다던지, 돈가스를 좋아하는 걸 알고 계시는 학교 식당 어머니가 군대 간다니 돈가스를 곱빼기로 주셨다던지… 찍먹이건 부먹이건 모든 방식을 좋아하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방식은 ‘비먹’이다. 

난 이 싸구려 스프가 그르케 맛있더라

일단 함께 나온 수프와 함께 돈가스’만’ 차분히 먹기 시작한다. 돈가스만 먹는 게 포인트. 느끼하다면 소스를 듬뿍 찍어 풋고추와 함께 먹으면 좋다. (당연히 맥주도 한 잔 곁들이면 좋겠지) 단, 함께 나오는 양배추 마카로니 샐러드와 베이크드 빈은 어지간하면 건들지 말자. 이렇게 돈가스를 반쯤 먹었다 싶으면, 그때 돈가스를 10원짜리 동전 크기로 잘게 썰기 시작한다. 좀 귀찮겠지만 이걸 잘게 잘라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모두 잘랐다면 당당하게 소스 리필을 요청하자. 이때, 반드시 소스는 따로 종지에 달라고 해야 한다. 소스가 확보되었으면 이제부터 접시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비비기 시작한다. 읭? 무슨 말이냐고? 장난 치는 줄 알겠지만 절대 장난이 아니다. 

비비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 어우 침고여

베이크드 빈, 양배추에 뿌려진 케첩반 마요네즈 반의 싸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까지 남김없이 싹싹 비볐으면 데미그라스 소스에 후추를 쳐서 밥이 뻑뻑하지 않게 간을 맞춰가며 비벼준다. 아마 비주얼은 이때쯤 되면 굉장히 험악할 텐데, 편견을 가지지 말고 굳센 마음으로 한 입 밀어 넣어보자.


어때, 기가 멕히지? 이게 보기보다 되게 맛있다. 잘게 잘라진 고소한 튀긴 고기와 밥의 맛에 새콤한 케첩과 마요네즈, 묵직한 데미그라스 소스 등등 온갖 맛이 다 섞여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신기한 맛이 나는데 사실 각각은 다 아는 맛이라 거부감 없이 잘 어울린다. 마카로니와 베이크드 빈은 가끔 씹혀 맛에 포인트를 더한다. 언젠가 신서유기에서 이수근도 돈가스 비빔에 대한 찬양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보기에 되게 이상해 보이는 건 사실. 


예전에 동네 왕돈가스집에서 돈가스를 먹은 적이 있다. 늘 하던 대로 맥주 한 병과 반쯤 먹다 남은걸 비비기 시작했는데 옆자리 할머니가 갑자기 엄청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무리 음식이 맛이 없어도 그르치!
먹질 말던가 음식 가지고 그렇게 장난을 쳐?!


갑자기 훅 들어와서 좀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 저 이거 먹으려고 비비는 거예요’ 하니까 할머니는 그걸 어떻게 먹냐며 거짓말하지 말라신다. 좀 짜증 났지만 잘 비벼진 돈가스밥을 한입 두입 떠먹기 시작했다. 욕먹고 먹으니 그날따라 더 맛있어서 아주 접시를 핥아먹을 지경이었는데 할머니가 또 한소리를 하신다. 


저 싸가지 없는 놈. 할미가 잔소리 좀 했다고,
억하심정에 그걸 억지로 다 먹네


아… 유튜브로 찾아서 이수근이 비벼먹는 영상을 정말 보여주고 싶더라. 졸지에 그 집은 돈까스 맛없는 집 취급을 받았구만. 집안 식구들이랑 먹을 때 그렇게 먹다가 혼나기도 했지만, 나이가 80이 넘어도 난 돈가스를 비벼 먹을 것 같다. 암암, 돈가스는 비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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