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취급 받을지언정 저 국물과 건더기에 한잔 하련다
일상이 여행이라 핑계대면서 눈누난나 하는 프리랜서 백수가 이런 날씨에 마음이 콩닥대지 않으면 문제가 있지. 하지만 이런저런 어른의 사정으로 여행을 갈 수는 없고… 그럴 땐 타이 푸드나 베트남 쌀국수보다는 좀 더 에스닉한 요리를 먹어줘야 이 역마살을 잠재울 수 있다. 이런 날엔, 마라탕이지.
마라탕은 다양한 재료를 대나무 채에 모아 훠궈 국물에 끓여 1인분씩 내는 사천 지역의 ‘1인용 훠궈’ 같은 ‘마오차이’에서 시작했다. 1990년대 동북지방에서 마오차이에 마장과 땅콩소스를 넣어 고소한 맛을 추가해 자극을 줄여 손님들에게 낸 것이 바로 마라탕이다.
대부분 마라탕 전문점은 마라탕과 볶음 요리인 마라샹궈를 함께 취급한다. 마트의 신선 야채 코너 같은 냉장고에서 원하는 재료를 바구니에 담아 종업원에게 건네면 무게를 달아 고기 육수에 조리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 이것도 가게에 따라 다르지만 소시지나 완자 꼬치, 양고기나 쇠고기, 돼지고기는 별도로 가격을 매긴다. 보통 100g에 1700원 정도가 한국에서는 정석인데 마라탕은 6,000원어치 이상, 마라샹궈는 20,000원 이상 주문을 받는다고 보면 된다.
청경채와 건두부, 배추는 필수. 나머지 채소는 취향 따라 넣는다. 무게를 차지할 수 있으니 목이버섯은 물기를 탈탈 털어 바구니에 담고, 오뎅은 국물을 머금고 확 불어나니 두어 개만 담도록 하자. 비엔나소시지를 그냥 주는 곳이 있는데 꼭 넣도록 하자. 생각보다 마라탕에 짝짝 붙는다.
라면과 우동사리, 쌀국수 면, 중국식 당면과 떡볶이만큼 굵은 중국식 면 등 다양한 종류의 면이 있는데 옥수수 면은 꼭 넣어야 한다. 나머지 면들은 취향 따라 알아서. 고기 없이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뭔가 묵직한 한방을 원한다면 양고기를 추가하자. 아, 고수는 취향 따라 알아서 넣는데, 어차피 마라 소스가 워낙 강해서 초심자는 넣건 말건 잘 구분을 못하더라. 씹힐 때 나는 고수의 향을 좋아한다면, 고수는 따로 채 썰어서 달라고 하자.
이제 바구니를 종업원에게 맡겨 계산하고 룰루랄라 기다리면 중국 냄새 펄펄 나는 한 그릇의 마라탕이 금세 내 앞으로. 이제 잠시 중국이구나. 마라탕의 첫 술을 뜰 때는 드시 숨을 들이쉰 후 음식을 입에 넣어야 한다. 만약 먹는 도중 숨을 들이쉬기라도 한다면 마라 향이 확 코에 들어오면서 ‘엣취!’ 재채기를 할 수도 있다. 희한하게 첫 숟가락을 뜬 후로는 그리 재채기가 나지 않더라.
아, 주문할 때 매운맛 단계를 물어보는데, 맵찔이는 당연히 1단계 또는 2단계겠지만 나 같은 고통 마니아는 3~4단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다년간 분석한 끝에 굳이 3~4단계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마라탕이 가진 특유의 매운맛 때문이다.
‘매운맛’ 하면 혀의 통각 세포를 자극하는 고통의 맛이다. 하지만 마라탕의 매운맛은 조금 그 양상이 다르다. 마라탕의 매운맛은 크게 ‘화지아오(花椒)’와 ‘고추’의 두 가지 자극이 섞인 것이다. 마라의 마(痲)는 ‘마취’ 할 때 그 한자로 화지아오에 들어있는 하이드록시 알파 산쇼올(hydroxy alpha sanshool)이 입을 얼얼하게 만든다고 한다. 중국어 ‘라’(辣)는 한자로 하면 ‘매울 랄’ 자로 중국 사람들은 ‘매울 신’ 대신 이를 쓴다고 한다. 아 또 마라탕 한 그릇에 TMI 터지네.
이 두 가지 매운맛이 다 들어간 게 마라탕이다 보니, 매운맛을 계속 올려봤자 우리가 느끼는 매운맛은 나지 않는다. 되려 화지아오의 얼얼한 맛이 혀를 마비시켜 제법 매운데도 그 알싸한 느낌적인 느낌이 나지 않아 입안이 이상한 기분이 된다. 4단계를 먹고 물을 마시면 물파스 같음. 그러다 보니 그냥 적당히 화지아오의 얼얼함을 느끼면서 한국식의 칼칼함을 추가하려면 2단계 매운맛을 주문해 거기에 고춧가루와 후추를 넉넉히 풀어내는 것이 낫다. 1단계는 노노함. 거기엔 또 화지아오가 너무 조금 들어가 마라탕 특유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라탕과 훠궈 국물을 떠먹으면 중국에서는 거지 취급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자. 중국인들은 마라탕의 건더기만 건져먹고 국물은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2019년 2월 상하이에서 중국/홍콩지역 담당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마라탕을 시킨 적이 있었다. 오우 역시 본토답게 엄청 희한한 향도 많이 나고 맛있어서 후루룩 건더기를 먹고 국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는데, 담당자들 얼굴이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술도 한 잔 하는 자리라 ‘왜 그러냐, 혹시 내가 국물을 마신 게 잘못된 것이냐' 물으니 한국어 통역이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중국 사람들도 마라탕 국물 몸에 안 좋다고 안 먹어요
사실 그 국물, 대놓고 자극적이지만 은근히 맛있는데 저 말은 충격이었다. 사실 향신료가 아니어도 기름기 그득에 짜고 매운 양념은 다 들어간 국물이니.... 그런데 이게 단순히 카더라가 아니라 2019년 중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마라탕 국물까지 마실 놈’이라는 말이 욕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초월 번역을 해보자면, 아무도 안먹는 국물까지 먹을만큼 거지새끼라는 뜻이겠지.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정한 화합을 상징하는 음식이 마라탕이 아닐까 싶다. 오만가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재료들이 그보다도 더 이질적인 화지아오, 팔각, 정향, 회향을 넣은 국물에 한데 몽땅 빠져 한 그릇의 요리로 태어난 것을 맛보는 그 생경한 느낌. 이게 동서양의 화합이 아니고 뭐겠나. 아, 동양만의 화합인가, 왓에버.
중국 사람들이 뭐라 하건 말건, 마라탕 국물에 소주 한 잔 빼갈 한 잔은 정말 맛있다. 욕하라 그래 썅. 원래 몸에 안 좋은 게 맛있는 거란 건 진리잖아. 이번 주에는 누가 뭐라 해도 음악 하는 우리 형제들과 훠궈에 빼갈 한 잔 하러 가야겠다.
아, 마라탕은 국물이 죄다 기름이라 국물이 튀면 빨래하기 좋지 않다. 그러니 반드시 앞치마를 달라고 해서 입고 먹도록 하자. 그리고 더 신경 쓸 점은, 반드시 앞치마를 벗고 나오도록 하자. 혀가 얼얼해 정신 못 차린 나는 방이동에서 마라탕을 먹고 천호까지 저러고 왔다. 정신 차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