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보송보송 마른빨래를 걷는다. 반나절 만에 빨래를 말린 성급한 바람처럼 그녀의 팔십 년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누군가 그녀의 세월 밖에서 그녀의 한 삶을 지켜보고 있다가 빨래를 걷듯 묵숨 줄 휙 걷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은." 정지아(2009).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2009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였다. 흠, 시작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누가 보면 작가 정지아하고 연애하는 줄 알겠다. 연애하고 싶다고? 대상은 아니고 우수상 수상작.
'봄날 오후, 과부 셋.' 제목이 기가 막히다. 봄날 오후, 총각 셋 혹은 봄날 오후, 홀아비 셋 하면 내용이 달라질까? 봄날 오후 총각 셋이 모이면 뭘 하지? 홀아비 셋이 모여 봄날을 어떻게 보낼까? 궁금했다. 정지아가 누군지 말이다.
앞에 인용한 문장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 우리의 세상 밖에서 우리의 삶을 지켜보다가 목숨 줄 확 걷어버리더라도 좀 두렵긴 했다. 그렇게 끝나고 싶지 않았다. 남들이 나를 결정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정말 지나고 보면 누가 확 우리 목숨 줄 걷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겠지. 역시나 비장한데, 이게 작가의 덕목인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웃기고 있네라고 비웃는.
작가에 대한 이런 기억을 품다가 제목이 지나치게 진부(?)하게 느껴져 이 책을 골랐다. 《자본주의의 적》(2021). 내용은 그렇다 치고 아직도 자본주의라니. 그것도 《자본주의의 적》이라니. 식상했는데, 제목들이 상당히 도전적이다. 예를 들어 보면,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도 도발적이다. 박사 아닌 사람들은 섭섭해서 살겠나? 난, 섭섭하지 않지만 말이다. 〈애틀랜타 힙스터〉도 그렇고. 〈계급의 완성〉도 그렇고. 이 작가 보통이 넘는구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 읽는 그녀의 작품집이라서 이 작가의 경향을 파악하는 게 쉽지 않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의 주인공 기택. 암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그의 아버지가 평생 술만 마시며 살다 암으로 죽은 것처럼. 왜 그랬을까?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대략 빨갱이라고 눈앞에서 죽임을 당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암으로 죽고. 기택 또한 평생 노동자로 살면서 계급의식 없이 살아온, 그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 이런 인간들 보면 그냥 짜증 나는데, 이게 작가가 노리는 바임을 모르진 않는다. 왜곡되고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라니. 이게 2020년 김유정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이렇게 읽는 독자로 하여금 묘사되는 주인공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는 다른 글로는 〈자본주의의 적〉도 있다. 자본주의의 적이라니. 엄청 대단한 서사가 펼쳐질 것 같은데, 웬걸.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소심이들? 타인과의 경쟁과 관계 속에서 생활의 방편을 이룬 절정 고수 방현남이 주인공이다. 안기부에 잡혀갔는데 무탈하게 돌아온, 그런 그녀의 남편과 그 가족들. 그 와중에 운전면허를 따려는 노력과 요구르트 아저씨를 꿈꾸는 그녀의 아들이라니. 세상에서 다치지 않는 비기를 갖고 있는 고수의 삶이라니.
존재의 증명? 그렇고 보니 내가 나임을 누가 증명하지? 결국 나 일 텐데, 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카페에 있던 건 알겠는데, 내가 어디 사는 줄은 모르는.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커피나 액세서리의 취향은 기억한다. 이게 가능한지를 떠나서,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취향의 변화? 그게 내가 나 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니. 이를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은 주인공을 통해 묘사해 내다니.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그리 처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말이다.
신분 상승이란 형태가 없인 계급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 〈계급의 탄생〉. 제목이 엄청 거창해서 대단한 얘기인 줄 알았더니, 애잔함이 철철 묻어 나오는, 그래서 아들의 발바닥의 각질을 벗겨내면 새로운 계급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경비원 월급에 '풋 케어'라니. 그 아들도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새로운 신분상승이 아니라 유지되는 계급의 서글픔을 '풋 케어'로 보여준다. 슬픈 코미디 같으면서도, "그 혼자 그런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그보다 못한 처지의 인간들도 숱하게 많았다"를 보다 보면 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힙'한 게 멋진, 쿨함을 의미한다면 이건 한국의 어느 촌구석 소읍에는 맞지 않다. 이곳에 위치한 카페에 모인 힙스터라니. 그것도 조지아에 있지만 애틀랜타도 아니고, 그곳 어디 촌 동네에서 온 존과 그에게 영어를 배우는 미경 그리고 인도 문화에 빠진 카페 주인까지. 이들 모습은 오로지 화자 스텔라를 통해서 묘사되는데, 음악가라는 존이 연주하는 음악이 어설픈 '벚꽃엔딩'으로 끝나고. 그새, 벚꽃이 폈다 졌다. 그래도 다른 단편 〈검은 방〉과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처럼 우중충하지 않아서 좋다.
고액 연봉자이면서 금수저와 연애를 하는,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새끼가 슬프게 우는 거야 엄마 젖 달라는 거지만, 어미 고양이는 그래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 주인공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건 쉽게 신분상승을 바라지 않는 작가의 마음 같기도 하다. 그랬다면, 고양이를 받아들이고 자기가 키웠을 텐데 말이다. 그냥 금수저 남자친구와 결혼해버리지? 현실적인 이게, 대부분의 진짜 결말 아니던가.
개가 주인공이라니.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이미 정유정(2013)의 《28》를 통해 알 듯했는데, 똥개를 통해 임신하는 과정에서 실소가 나왔다. 동네 개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개라니. 이 개는 시베리아 초원을 달리던 야생의 개인데 말이다. 똥개 말고. 이게 〈아하 달〉이다. 이렇게, 전체 소설집이 다양한 작가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처연한 작품, 이게 정지아? 뿐만 아니라 시트콤 같은 소설도 보이고, 그럼에도 그녀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현실이다. 거스를 수 없는. 거스르지 못하는?
그래서, 〈검은 방〉같이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도 있는데, 이게 작가 정지아지,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 여기선 사상을 위해 목숨도 초개같이 버렸던 빨치산과 그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 어머니는 이미 아흔아홉. 그들 사이에 사랑의 증표, 딸. 이게 아무리 빨치산의 아내라도 "사상 말고, 그녀가 찾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가 되고. 이게 소설이기에 가능한 거지만,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 이상인게 소설 아닌지.
작가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지방대라던가 강사라던가 박사라던가 이런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대놓고 자기 이름을 걸었다. 문학박사 정지하의 집이라고 다를까만은, 이게 신문에 나온다니, 박사가 누리는 소확행이라니. 그래서, 박사가 가꾸는 텃밭은 달라야 한다. 박사이기에 잡초가 없이 깔끔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박사의 집. 이게 박사 정지아뿐만 아니라 박사가 머무는 시골 마을의 자존심이다. 그래서 달리 박사인가. 박사가 머무는 집이니 달라야 할밖에.
지난 역사에 대한 처연함뿐만 아니라 실소를 머뭄게 하는 묘사라던가,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역시 박사가 쓴 소설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