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반복되면 면역이 될까?

조해진(2017). 빛의 호위. 창비

by 길문

언젠가 외로움이 풍화될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외로움이 풍화되기는커녕 눈처럼 자꾸만 쌓일 것으로 결론냈었는데. 그럼, 슬픔은? 슬픔이 반복되면 면역이 될까? 슬픔이 반복되는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기 안에 내재된 슬픔이 해소될까? 슬픔이 해소되는 게 면역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슬픔은 어느 정도 해소되겠지만, 면역이 될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외로움이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듯이, 슬픔도 그 층이 켜켜이 쌓여질 수 있어서, 이 또한 면역이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해소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것도 잊는 것이 최선일까? 시간이 지나가면 사물의 경우 풍화되듯이. 슬픔을 잊는 최선은 기쁨을 찾거나, 알아서 흩어지도록 내버려 두거나, 시간이란 만병통치약으로 치료를 하거나 등 나름 방법이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작가 조해진이 쓴 소설집이 있다. 제목은 빛의 호위. 그 외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이 소설들은 서로 다른 내용이다. 단편집이니 다른 주제가 당연할 텐데, 이 당연함이 역시나 조해진이란 작가기 때문에 당연할 것 같다. 몰랐던 작가였는데 말이다. 읽다가 이런 작가도? 하고 빠져든 작가. 그중 가장 슬펐던 작품이 〈잘 가, 언니〉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화자의 여정. 아마, 31세에 요절한 재미 미술가이면서 작가인 차학경을 모델로 쓴 소설처럼 빼박같다. 그게 중요할까? 이로 인해, 그녀의 유고작 《딕테 Dictee 》를 읽어봐야 할 의무감만 남았다.


여유롭지 않은 집안, 심장이 좋지 않은 동생으로 인해 좋아했던 미술을 포기하고 유학생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떠난 언니. 그 언니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자기 안에 남아있던 부채의식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주인공. 시작은 차학경을 언니로 둔 동생의 편지 때문이었다. 언니의 죽음과 차학경의 죽음, 차학경의 동생과 화자. 언니가 "떨어뜨린 한줄기 실" 그 실타래를 따른 것처럼 미국에서 산 세월 17년. 비로소, 언니에 대한 부채를 스스로 벗어나는 동생. 다행이다. 언니를 보낼 수 있어서 말이다. 읽는 독자 마음까지 보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슬펐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친구로부터 받은 카메라. 그게 누군가에겐 빛이 된다면. 그게 그에게 엉키고 뭉친 삶의 돌파구가 된다면. 그래서 권은은 세상에 나와 분쟁지역까지 넘나드는 사진작가가 된다. 그곳에서 피격을 받아 다친 권은과 그 권은이 한때 자기가 카메라를 준 친구였음을 알게 되는 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에 등장하는 죽은 노먼 마이어와 그 아들을 잃은 알마 마이어. 그 알마 마이어는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그녀를 구해낸 '장 베른'를 세상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작가가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기억하자고. 그게, 우리 의무라고 말이다.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이게 모티브가 된 소설 〈사물과의 작별〉. 글 모두에 '슬픔'이란 단어를 강조했던 것은 개별자들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구조적으로 엮인, 엮은 게 아닌, 그래서 개별자가 아니게 된 사람들의 슬픔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도대체 이 작가는 뭐지(!)라는 질문을 갖게 한. 이 작품이 그녀 전체를 상징할 수 없지만, 이게 조해진이구나를 알게 한 단편. 여기서 고모가 느꼈을 부채의식이란? 그래서 슬픈 것이다. 어쩔 수 없었는데, 시대 탓인 건 맞지만, 누군가를 통해 시대가 던진 짱돌에 맞아 비틀대는 개인사라니. 여기에, 알츠하이머를 알고 있던 고모이기에 결국 사물뿐만 아니라 생각이 나 기억까지도 작별을 해야 하다니.


산책. 머리가 좀 복잡해졌을 때 아주 좋음에도 불구하고, 20년간 철학과에서 강의를 했었던 삶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바뀌었다면, 여유롭고 한가하게 산책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제자에게 "살아있는 동안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라던 그녀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을까? 어떻게 자기 삶에 집중할 수 있을까? 한때 제자였던 메이린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면서, 누군가에게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유할지를 묻던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이게 〈산책자의 행복〉인데,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면 오독일까?


〈문주〉. 문주가 기둥이기도 하고 먼지이기도 한데, 그 문주가 자기를 버린 부모를 찾는 게 아니라, 자기를 철로에서 구해준 기관사를 찾는 여정. 이게 단순히 자기 이름을 지어주고 보살펴준 사람을 찾는 한 달간의 여정일까?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프랑스인이란 정체성에서 보여주는 나나의 실존은 문주일까 나나일까? 자기를 초대한 서영의 집에 머물면서 알게 된 복희 할머니. 그 복희가 그 할머니의 진짜 이름이 아닐 수도 있음에, 그녀가 혹시나 버린 딸 이름으로 불렸다면. 이로인해 갖게 되는 문주의 마음이란. 그래서 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돌렸는데, 다음 날 할머니가 죽는다.


보육원에서 자란 균. 슬픔조차 사치가 되는 기억을 가진. 스스로 갖게 될 수밖에 없는 결핍을 이겨내려 10년간 앨리를 후원했는데. 그 앨리를 후원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앨리는 나 외에도 많은 후원자를 갖고 있었다. 채워지지 않은, 이미 결정돼 버린 미래를 버텨줄 수 있던 것은 앨리였는데 말이다.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 내 건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겠다는 앨리는 나의 단 한 사람, 가족이어야만 했다. 그런 앨리에게 6개월 동안 연락이 없다. 그래서 받게 된 후원단체의 편지엔 복수였다. 나만이 아니었다. 후원자 말이다. 나만이 앨린의 가족이여만 했는데 말이다〈작은 사람들의 노래〉.


시간에 거절당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시간의 거절〉이라니. 여기서도 작가는 어느 특정인을 그대로 쫓지 않는다. 여전히 교차편집하는 것처럼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서로 비교함으로써 작가가 어떻게 주인공을 드러내는지 그 방법을 철저하게 활용한다. 기자 생활을 하다 해고되는 '석희'와 제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미국의 주인공. 다른 시각. 그런데, 같은 곳을 보는 이야기, 한곳을 바라보게 만드는 내용. 파업 현장에 찍힌 석희 사진을 보면서 그녀를 작품을 만들어낸 제인. 그녀가 그녀를 초대한다. 그들 삶 속에서 어떤 게 자기 모습이었는지. 타인이 바라본 내 모습이란, 이게 진짜? 기차를 타고 가다 본 울고 있는 여성 제인이 결국 석희 아니었던가. 시간은 흘러갔고, 그래서 과거가 만들어졌고, 이 과거는 되살릴 수 없으니 말이다.



<동쪽 伯의 숲>. 세상에서 흔적을 남긴 굴직굴직한 사건들을 소설 속에 끌 여들여오는 작가. 이게 그녀가 세상을 접하는 사고방식이다. 어느 편을 들거나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시대가 남긴 흔적에 생채기를 당한 사람들을 덤덤하게 묘사하는. 시인 희수는 발터가 자신의 할머니 한나의 사랑 안수 리를 수소문하는 요청을 받는다. 독재권력에 의해 어떻게 희생자가 만들어지는지, 어느 정도 세상을 산 사람이러면 다들 알았던, 그런데 잊혀가는 이야기들. 여기서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런 개인의 희생이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 자기검열에 묻히게 만드는. 그래서 국가권력이 어떻게 개인들을 망가트리는 것 이상으로 폐해가 더 큼을 알게 해주는 소설.


그런데, 그때 그 악역을 담당하던 사람들은 지금 뭐 할까? 연금 받아 가며, 자기 자식들이 나은 손주들을 '어부바'하며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 듣고 있을까?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더 슬픈 것 같지만, 다행히도 우린 그런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을 것 같다. 그들도 시킨 일이라고 변명하겠지만. 그저 상처받고 힘든 우리들에게 이런 슬픔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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