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다영이 쓴 〈뷰티〉가 더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짧고 강렬한. 이 이상 표현하기 어려운 작품. 병실에서 만난 노을과 하늘. 그들의 죽음. 섬뜩했다. 이런 게 사는 거면 너무 쓸쓸했을. 병실에서 만난 노을과 친구가 된 건 19살 때였다. 이때 노을의 동생 하늘이 찍어준 사진 속의 기억. 그 후 하늘을 만난 건 내가 26살 생일날이었다. 아는 체할 시간도 없이 사라진 하늘의 모습.
어느 날 하늘이 공황상태로 운전 중이었을 때 그를 구해준 날, 나의 나이는 4년 후가 지나있었다. 그동안 하늘은 나이 23세에 이르기까지 이미 망가질 데로 망가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가난과 절망, 여기에 부모의 죽음도 포함해서. 그 후 7년이 지나서는 단톡방에서 하늘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스스로 생을 등진 하늘. 그러고 보니 37세 되면서 한 인간을 알게 되며 느낀 운명이라니. 그 후 주인공은 뭐 하고 살고 있을까? 소설이니 여기서 끝내야 하지만, 이렇게 명징해서 좋았었다. 그런데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 작품들은 어땠을까?
손보비 〈해변의 피크닉〉. 어린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라니. 그렇다고 그 세계가 엄청난 모순 덩어리인 것 같지도 않다. 신비할 것도 없는 어른의 세계, 어린이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성을 터치한 소설이라. 어린 어린이가 커도 그런 세계를 벗어날 것 같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 이게 세상인데. 작가의 한계였을까? 어린이들이 다들 그렇게 클 것 같지만 그런 과정을 농밀하게 집기는 쉽지 않을 터. 작가는 그렇게 어린이로 돌아가 있었다.
해마다 방학이면 부산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보내야 했던 사춘기 소녀. 그녀의 시선으로 할머니와 삼촌과 그 여자친구를 바라보는 심리를 예리하게 표현한 작가. 남자라면 어림없었을 섬세함이라니. 문학에선 이렇게 세밀한 묘사를 통한 성장과 인물 간의 긴장관계를 높게 평가하는 것 같다. 삼촌이 얘기하는 "너희 엄마가 여름마다 너를 여기에 보내는 대가"와 "난 네 아빠의 반쪽 자리 동생"이 주는 긴장관계가 폭발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작가와 그 과정이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그려진다. 그게 작가긴 하지만 말이다.
위수정〈풍경과 사랑〉. 중년 여성의 바람? 이 작품이 대상이었다면 논란이 많았을 것 같다. 한때, 사회비판적인 영화제작이 어려워 감독들이 에로영화로 활로를 뚫고 시대가 바뀌길 기다렸다고 했다던데, 그런 작가들이 그렇다고 다른 작품들을 만든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런 영화로 제작했으면 딱 좋았을 영화. 작가도 그러고 싶었겠지? 주인공처럼. 바람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아들 친구에 느낀 성적 취향이라니.
평론가는 "너무도 당연시했던 일상적인 자아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인지를 솔직히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평했던데, '솔직'하다는 점 외에 어떤 문학적 성취가 있었을까? 아는 사람이 자긴 순수소설 같은 것은 재미없다고 하던데, 여기서 순수소설이 작품에서 보이는 사회성도 없고,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도 담기지 않은 소설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이에 해당될 것 같다. 문학상이란 게 그것도 특정 이름을 단 상이라서, 어련히 알아서 맞게 작품을 추렸을 터. 그것에 이의를 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한정현 <쿄코와 쿄지>. 소설이라고 알면서 읽지만 정말 읽히지 않았다. 재미와는 별도로 많은 의미 때문인 것 같았다. 이를 작가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면 작가가 욕하겠지? 네가 뭘 아냐고? 이름을 굳이 그렇게 계속 바꿔서 진행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이를 위해 작가가 기울인 노력은 정말 가상하다. 많은 사료를 기초로 쓴 소설. 경녀, 혜숙, 미선, 영성에 대한 회고록? 경자, 혜자, 미자, 영자로 이름을 개명한 이유는 서로 연대감을 갖기 위해서이다.
혜자는 오빠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자라고, 미자는 외할머니가 일본인이면서 어머니가 무당이다. 여기에 친일파라는 낙인까지. 영자는 남자이면서 생리를 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경자는 이름이 아들자로 기록되어서 쿄코로 불리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 그들이 자자를 스스로 '자'로 명명했던 것처럼 쿄지로 불리기를 원한다. 광주항쟁과 성 정체성, 여기에 남녀 차별까지. 이를 다 보여주기에 소설이 너무 짧았던 것은 아닌지.
신종원〈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 이 소설도 읽기 어려웠다. 위수정 소설처럼 단세포적인 자극도 없고. 사물을 통한 인간의 탐구라는데 글쎄다. 글쎄다. 사물이 걸어온 역사라니. 그때, 사물이 말할 수만 있다면 굳이 인간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결국, 인간에 대한 아니면 인간을 위한 글이 되어야 할 텐데. 잘 모르겠다. 잘 읽히지 않았으니. 그렇다고 소설로서의 가치가 없었을까? 그건 전문가나 평론가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박물관에 전시된 아주 오래된 악기 '엘가'와 자원봉사자에 대한 이야기. 이 자원봉사자가 노인이고 그의 역할은 '엘가' 주변에서 그 악기를 보러 온 관람객들에게 설명도 하고 주의도 주는 다른 주인공. 잘 읽히지 않으니, 지루하고, 그러니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무슨 얘기였더라?
그러고 보니, 결국 권여선의 〈기억의 왈츠〉만 남았다. 대상이라 남겨둔 건 맞다.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 뭔가 다름을 발견해야 하는데 말이다. 역시나 문장이 서늘하다.
"꼬리털이 반쯤 벗겨진,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꼼짝 못 하고 여자가 휘두르는 폭력의 자장 안에서 벌벌 떠는 강아지는 나의 과거 같았고 머리숱이 적고 군데군데 뽑힌 듯한 헌 자국이 있는 술 취한 여자는 나의 미래 같았다...... 지나온 삶만큼이나 살아갈 여생도 끔찍할 것이다...... 날파리 떼가 달라붙은 거미줄 같은 수의를 입고 홀로 죽게 될 것이다.
죽어, 버릴까......
죽여, 버릴까......"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는 작가." 30여 년도 더 지나서 자기를 좋아했던 경서라는 남자를 떠올리는 여자, 그 여자가 느끼는 감성이란 게 85세까지 살 때, 그날 왈츠를 출 것이라니. 소설 속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날이 꼭 와줬으면 좋겠다. 그게, "잿빛 수의의 기억을 은빛 베일의 기억"으로 변하게 하는 마법이라는데. 마법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