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꼈을까?

프란츠 카프카(2014). 심판. 문예출판사

by 길문

인간 존재의 불안감과 소외감을 주로 다룬 소설가라는데, 이건 맞는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겠으나 책에 대해서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불안감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피로감? 글쎄다. 피로감은 좀 느꼈던 것 같다. 이게 뭐지 하는.


그런데, 책 때문이지만 이런 소외감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다. 스스로 소외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고? 읽지 않으면 된다. 책이란 것이 읽다가 재미없으면 읽지 않으면 되니까. 이게 실존주의 문학인가? 실존주의 철학, 실존주의 문학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단어이다.


20세기 초중반 이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이 허무와 절망감을 느끼는 상황을 극복하여 진정한 인간상을 확립해서 잃었던 자아를 발견하려는 게 실존주의 문학이라는데, 이 책을 잃고 주인공이 느꼈을 절망감과 허무는 어느 정도 전달이 된 것 같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은 모르겠는데, 피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무력한 인간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 스스로 느끼는 부조리하다는 게 뭘 말하는 것일까? 존재할 가치가 없는데 존재하는 상황이 부조리한 것 아닐까? 다들 잘들 살아가니 부조리한 것 같지는 않고. 이해할 수 없다, 합리적이지 않다, 모순이다. 이런 특징을 인간에 대입하면? 그렇게 소설을 이해하면?


"개같이!" 이게 주인공 요제프 K가 죽으며 한 말인데,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서 이 말을 뱉은 것인가? 아님, 자기를 죽인 두 명의 남자가 자신의 종말을 지켜보는 그 상황에서 자기가 개같이 죽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뱉은 것인가?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라는 마지막 말은 작가의 생각이지만 죽은 사람이 느낄 치욕이란 게 있을까? 이런 게 부조리하긴 한 것 같다. 자기를 죽게 만든 체계를 정확히 드러내지도 않고, 이게 사회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명확히 드러내지도 않고. 주인공은 아무튼 죽고. 인간이 죽었기에 부조리한 게 아니다.


예전에 읽었던 〈변신〉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문학이 감동이나 교훈을 주는 장르가 아님을 실존주의자들은 주창했다는데,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읽는 내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체계, 사법 시스템에 대해 의문이 들기는 했다. 이게 가능할까? 내가 왜 죽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남들은 내가 '소송'을 당한 것은 다 아는 이상한 상황. 이게 가능한지 묻지는 말자. 그러고 보니 실존주의가 합리주의나 실증주의에 반한 것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사법체계가 어찌 가능할까 생각하게 했으니.


우리 대부분은 소설을 읽으면서 명확한 인과관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개연성을 찾지 않던가? 아마도 그럴 것 같은 현실. 우리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현실. 이걸 감안해서 읽는데, 이걸 감안하지 않아도 되는 소설이라니. 그래서, 읽다가 그냥 중간에 멈추고 다시 읽어도 내용 전개가 그리 어렵지도 않고,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 소설. 문학이 꼭 감동을 줘야만 하는 것인지 그들의 질문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전적으로 다 동의가 되지도 않는다. 인간 개개인이 느끼는 실존적 상황을 그려내기만 하면 멋진 소설! 그래도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그 무엇 때문에 소설을 읽지 않던가. 그들의 생각을 알 것 같은데, 지금 실존주의 문학가들은 어떻게 지내더라?


"하지만 나는 죄가 없습니다. 그것은 착오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나 나나,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인간입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죄가 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죠." p.263


그들이 온다는 통지를 받지 않았는데도 K 역시 마찬가지로 검은 예복을 입고 문 가까이 의자에 앉아서 손에 꼭 맞는 새 장갑을 천천히 끼고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내게 오기로 되어 있던 사람들이 그러니까 당신들입니까?" p.278


자기가 소송을 당한 것은 아는데 왜 당했는지는 드러내지 않는 이게 부조리겠지? 은행원으로 일하는 요제프 K가 서른 번째 맞은 생일날 아침,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그들이 그에게 당신은 '체포'되었음을 알린다. 그를 대상으로 누군가 '고소'를 해서 형사소송이 진행될 것이라는 통지. 이게 전부다. 무슨 소송인지 드러나지 않고 소설 속 주인공은 죽는 순간까지 알지 못한다. 알아보려는 노력이야 당연히 했지만 어떤 누구로부터 답을 듣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 변호사까지 고용하지만 누구도 속시원히 알려주지도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어떤 소송을 당하건 '소송'을 당하면 죄가 없어도 무죄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분명히 법원에서 그를 체포했지만, 구속되지도 않고 평상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일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 같은데 소송을 당했기에 법정에도 출두를 해야 하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이런 와중에 여성들과의 관계가 묘사되는데 이는 또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특히, 레니와의 관계가 계속 드러나는데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비현실적 이게도, 그래서 이것도 부조리하다. 부조리란 말을 마구 남발하다니! 그루바흐 부인이나 뷔르스트너 양이나 작은 아버지나 공장주나 화가나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대성당에서 만난 신부도 법체계와 관련된 신부이기도 하고.


그러다 그는 최후를 맞는다. 소송을 당한 지 꼭 1년이 지난 31세의 나이에 말이다. 그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 아닌 사건. 그래서 법률 소송이라는 제목의 der Prozess가 당연히 맞다. 심판이란 제목은 일본식으로 잘못 번역된 사례라는데, 마치 영어로 process처럼 느껴지는 게 소송이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의미. 365일 동안 벌어진 일. 이렇게 죽으면 허무하긴 허무할 것 같다.


작가가 처한 현실이 이런 소설을 낳게 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겠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벌어졌던 유럽. 그것도 유대계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이었고. 언어는 독일어를 구사하고 소설도 독일어로 쓴. 아버지는 상당히 강압적이고, 카프카는 어머니 쪽 성격을 많이 닮았다고 하고. 여리고 유약한 성격에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시달리고. 아버지에 대한 소심한 반발로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소심하게 살아가고. 그 와중에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글쓰기에 몰두하다니. 꿈은 문학도가 맞긴 맞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는 사후에 유명해진 작가가 아니라고 한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작가. 사후에 알려졌다고 하면 그가 쓴 작품이 더 위대할 것 같은 생각도 부조리한 것 아닐까?


당시 시대는 반유대주의에 독일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게르만과 슬라브주의가 유럽을 휩쓸었다는데, 정작 본인은 시오니즘을 받아들인 유태인도 아니고 그저 주변인이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실존주의 소설로 '소송'이 분류될 수도 있겠고. 실존주의 문학가 일부가 카프카를 실존주의 문학가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잠깐,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면서 체포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런 무고한 희생이 그리스 고전 '비극'과 유사하다는데, 이건 정말 공부를 해봐야겠다. 그렇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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