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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거리지 않는 소설.

루시아 벌린(2019). 청소부 매뉴얼. 웅진지식하우스

by 길문


접시꽃 씨, 참제비고깔 씨를 뿌렸는데 새들이 다 먹어버렸어…… 한 줄로 죽 앉아서…… 카페테리아처럼

평소처럼 운동한답시고 세 정거장 일찍 내려서 걸었다. 만나는 이 없어서 항상 호젓하게 걷는 길.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닿는 집. 그런데, 오늘은 이 루틴이 지켜지기 힘들었다. 저 멀리 산봉우리까지 시꺼먼 구름이 끼었다. 비가 오려나? 바람이 엄청 불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불면 비가 오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은 어디로 가버리고 뭔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산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발걸음도 빨라지고. 비가 오지 않았길망정이지 비가 왔다면 엄청 징징거렸을 것 같다. 들어줄 이 없기에 금방 말겠지만.


그래서인가? 그녀는 들어줄 이 없어서 뭐 이 정도 불행이야 별거 없군 한 것일까? 그녀 글은 툭툭 내뱉는 것 같은데, 대게 그녀 경험이 녹아들어서 그런지 전달되는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스스로 무덤을 판 걸까? 그냥 그런 사람이라서 이런 생을 산 것일까? 너무 이른 결혼과 실패. 반복이 3번 이어지면 이건 스스로 방기한 것이라면 그녀가 섭섭하겠지? 여기에 4명의 배다른 아이들과 먹고살기 위해 이런저런 직업을 거치고. 타고날 때부터 몸은 척추가 옆으로 굽어 태어났고, 여기에 알코올중독까지.


불행은 마치 알아서 찾아오는 것 같은데, 글에선 그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이 없다. 이 정도면 삶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징징거릴 만한데, 누군가의 눈물샘을 자극하려 애들 얘기도 슬쩍 흘릴 텐데, 그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런 그녀이기에 글 쓰라고 지원받은 기금을 그냥 프랑스 여행에서 날리기도 하고. 결코, 신은 불공평하지 않지만 어쩌다 돌아오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듯한 모습이 분명 나나 우리랑 달랐기에 글에 끌린 것 맞기도 했지만. 누가 그랬지. 죽어서 인정받으면 뭐 하냐고.


확실한 건 죽은 후 그녀가 세상에 알려졌는데, 이를 그녀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그런 그녀가 더 안타까운 건데, 짧은 소설 어디에도 그녀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원통하거나 억울해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니, 그 누구 탓을 하지 않기에 더 애잔했다. 이 책에 실린 43편의 단편 중 〈안녕〉에 나오는 말. 아 참, 이게 뭐지? 이런 식이다. 그녀의 글 말이다.


결혼이란 대체 뭘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제 알 수 없는 게 하나 더 늘었다. 죽음

그때 그녀가 느낀 죽음이란 감정은 어땠을까? 이 단편에선 "당신 어떻게 지내?"라고 끝나는데, 나 참 이래서 매력적인 것일까? 작가가? 두꺼운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감질나는 내용들은 또 어떤가? 소설이 전개되면서 드문드문 드러나는 그녀의 경험이라니. 그렇다고 소설이 기승전결을 따르지도 않고. 스토리는 알겠는데, 소설의 구성은 평범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울림은 처음엔 작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길게 느껴지는. 누군가 불행을 벗 삼아 그게 만들어진 그들의 작품들을 빛나게 하는 소품으로 작동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연민을 빼더라도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 아니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책. 당신 인생엔 항상 해가 내리쬐어 비바람 불고 어둡고 음산한 날씨를 경험할 필요가 없었으면 이해하겠다. 그럼, 읽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이 책이 우울하고 꿀꿀한 게 뒤엉킨 단편적인 기억들을 잊으라고 강조하지도 않는다. 아예, 작가는 그런 목표나 목적 없이 글을 썼을 것 같다. 그녀 생애에 초기와 말기를 빼면 나머진 다 먹고 사느라 허덕인 것 같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살다 죽었다. 그런데, 틈틈이 남긴 분신 같았을 그녀 글들엔 결코 인생의 회환과 후회가 묻어나지 않는다. 이건, 그냥 그녀의 배경 때문에 우리가 갖는 감상일는지 모른다. 여기에, 그녀는 결코 삶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이게, 나만의 느낌일까? 그냥 사진처럼 어떤 일상을 그리고 그 일상 밑바닥엔 그녀가 살아온 경험이 묵직하게 들어있고.


이 작가와 비슷한 작풍을 보여주는 다른 작가는 살아서도 유명해진 레이먼드 카버가 있다. 그도 역시 그녀와 같이 그가 쓴 소설들이 끝날 때 통상의 기대감과 다르다. 역시나, 미국에서 하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리얼하게 표현했고. 같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묘사하고. 절제된 언어와 생략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서술 방식으로 인해 미니멀리즘적으로 소설을 쓴다고 하던데. 오히려, 카버의 글보다 벌린의 글이 더 듬성듬성하다고 할까. 생각할 여지가 더 많다. 그런 벌린은 생전에 이미 카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 둘의 문체는 배경에서 나오죠. 감정을 드러내지 마라, 울지 마라. 남에게 속을 보이지 마라."


레이먼드 카버도 그녀만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가난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아내 복만큼은 남편 복이 박복한 그녀와는 달랐던 것은 확실했다. 카버보다 더 유망했을 첫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내조를 하고, 두 번째 아내는 옆에서 카버를 지켜내고. 그럼 벌린 남편들은? 다들 예술가적 감성들 때문인지 그냥 떠나가고. 애들만 쑥쑥 남겨놓고. 그녀가 쓴 글들은 단편이란 형태, 숏폼이란 형식 때문이겠지만, 간결하고 건조한 듯한 문체가 결코 질척대지 않고 경쾌하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이게 뭘까 하다 다시 읽어보면 그녀의 속내가 쏙쏙 드러난다. 여기에 여성이 갖는 감성이 세상을 드러내는데 적합해서 인지 그녀가 포착하는 일상들이 그저 사진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에게 삶이 주는 고단함과 슬픔보다, 아니 그래서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징징거리지 않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소설이 좋다. 그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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