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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맞짱 뜬 엘리야. 하고픈 말은?

파울로 코엘료(2022). 다섯 번째 산. 문학동네.

by 길문

'나의 여호와는 하느님이시다'라는 뜻의 엘리야. 그 엘리야가 신과 맞짱 뜨다니? 신약성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를 제대로 모르는 자가 불경하게도 선지자 엘리야를 언급하다니. 구약성경 열왕기상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야 말이다.

주님, 제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제가 당신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 언제입니까? 제가 그토록 못마땅하시다면 왜 저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저를 데려가시는 대신, 저를 구해주고 사랑해 주었던 이들을 또다시 벌하셨습니다. 당신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일에서 정의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게 안겨주신 고통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폐허가 되어 제 안에는 불과 먼지만 남았으니 저에게서 그만 떠나가주십시오. p. 233

이 구절만 보면 그는 신을 부정하고 앞으로 신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랬으면 성서 일부가 다시 쓰였겠지? 누군 이 책을 종교와 연관시켜 해석할 텐데, 그게 틀리지 않겠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엘리야가 신과 맞짱 뜬 게 아니라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자기 운명과 맞짱을 뜬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보고 당신 운명과 맞짱 뜨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 엘리야를 그 중심에 놓고 결국 자기가 하고픈 이야기를 한 것이다. 당연히 작가가 자기 하고픈 이야기할 텐데, 이 우문을 어떻게 벗어날까? 그건 그가 이 책을 쓴 시기와 배경을 이해하면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1996년에 쓰였다. 오래전에 쓰인 책이 지금 읽고 있으면서도 이런 책은 앞으로도 시간을 거스를 것으로 예상되는 뻔한 이유는 시련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을 끝냈을 때 자기가 부딪친 아픔과 고통이 생각났다고 한다. 승승장구하던, 세상이 원하면 모든 게 이뤄지던 시절, 그가 한 말로 인용하면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아준다네"처럼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지속된 건 1979년 8월 12일까지. 그 다음 날 아침 잘 나가던 다국적 음악산업은 더 이상 그의 밥벌이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을 썼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아주 오래전 작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하느님이 그에게 계시를 준 건 아니었는지. 그때 말이다. 그걸 그가 알았을까만은. 그런데 그는 기독교인이던가? 그가 쓴 책 많은 부분이 성서에 기초하지 않던가! 그가 브라질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이 책은 소설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 소재는 성서에 기초했고. 그래서 어디까지 성서 내용이고 픽션인지 알아보려다, 그게 핵심이 아니기에, 스킵하고 소설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성서를 제대로 모르기에 피한 것이지만.


도대체 이 책의 주제가 뭘까?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살다 보면 무수히 많은 역경과 고난을 만날 테고 그럼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 이겨낼지 이게 신이 우리에게 준 고통이겠지만, 이걸 이겨내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행복하게 살게 될까? 되겠지? 이런 상상력을 보여주는 소설가란 직업이 매력적인 거야 불문가지지만, 작가 스스로 경험한 그 고통과 번민을 성공적으로 이겨내서 전 세계 독자에게 주옥같은 글을 선사한 건 정말 신이 그를 왜 선택했는지 보면 알 것도 같다. 성공적인 음반산업 종사자 등 그간의 그의 성취가 의미 없지 않겠지만, 이를 알아본 그래서 우리들에게 힘과 위로가 된 선각자 코엘료를 알아본 건 '신'이기에 가능한 거다.


선지자 엘리야가 활동하던 북 이스라엘의 왕국의 왕은 아합이었고, 그 아합은 바알을 숭배하는 시돈 사람 엣바알왕의 딸 이세벨과 혼인한 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바알신이라니. 바알은 당시 가나안이들이 숭배하던 우상이었다. 풍요와 폭풍우의 신으로 대표적인 우상의 하나. 특히, 왕녀 이세벨이 바알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니, 그때 하느님의 메신저가 엘리야였다. 아합에게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앞으로 수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거란 예언과 함께. 풍요와 폭풍우의 신 바알과 대립이 될 수밖에.


그러니 이세벨은 엘리야를 제거하려고 하고. 소설에선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 대해 연정을 품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소설에서 이 여성은 세상을 뜬다. 대신 여성의 아들이 엘리야의 오른팔 역할을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녀의 아들이 우선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다 부활의 기적으로 다시 살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과부는 엘리야가 하느님의 선지자임을 깨닫게 된 후 하느님의 말씀이 곧 진리임을 알게 된다(열왕기상). 원래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로 돌아가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세벨을 제거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랬다면 엘리야가 신과 맞짱 뜰 일이 없겠지. 소설에선 선지자 엘리야가 절망과 고통의 땅 아크바르를 재건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래야 말이 된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나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련이 오히려 우리에게 도전이라는 메시지. 이게 코엘료가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후 그럼? 그래서 작가는 엘리야가 다섯 번째 산에서 한 말도 들려준다.

산에 오르면 우리의 영광도 우리의 슬픔도 대단치 않아 진단다. 우리가 얻은 것이나 잃은 것이 무엇이든 그저 저 아래에 남아 있지. 산 정상에 서면 세상이 얼마나 광활하고 지평선이 얼마나 멀리 뻗어 있는지 알 수 있게 돼. P. 322


이런 거다.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 결코 신의 섭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그렇다고 전적으로 신에 의지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맞짱을 뜬 결과가 신의 뜻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 이게 작가가 소설에서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종교 얘기 같으면서 종교를 벗어나 있다. 매력적이지 않던가?


그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얘기를 들려준다. 자기가 겪는 고통과 고난이 결국 과거일 수 있다는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서 귀가 솔깃해진다. 그리고 믿고 싶어 진다. 아니, 믿을 거다.

만족스럽지 않은 과거가 있다면 지금 당장 잊어버려요. 당신 인생의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해 보고 그대로 믿어봐요. 원하던 것을 성취한 그 순간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그럼 그 힘이 당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 내도록 도와줄 겁니다. p.251

그래서 엘리야는 어떻게 했을까?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엘리야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대신 아크바르에 남아 사람들과 연대하여 소중했던 삶과 그 삶이 머물던 터전을 복구한다. 주어진 굴레 그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기 뜻을 밀고 나간다. 이것이 바로 신이 역경을 이겨내는 주체도 결국 인간이며 인간 스스로 일어서야 함을 신이 일깨워준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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