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작가. 이 책(2007)을 읽지 않았어도 윈픽(onepick)으로 꼽았을 소설가. 이 책을 읽고 나니 역시나 김애란. 찾아보니 그녀 글을 꽤 읽었다. 《비행운》(2012). 《달려라, 아비》(2019). 《바깥은 여름》(2017). 여기에 이번 책에 수록된 《칼자국》(2018)까지. 아니구나. 장편 하나 더 《두근두근 내 인생》(2011).
무슨 소설 평론가도 아니고? 편식은 아니고 편애는 맞는 것 같다. 그런가? 다른 작가도 재밌으면 그랬던 거 같다. 그런 작가가 몇몇 있었는데,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면 작가가 싫어하겠지만, 밴드를 둘러도 같은 생을 산 건 맞는 것 같다. 시간대가 다르고, 내가 먼저 죽을 확률이 많지만.
읽고 나니 이 단편집이 나온 게 2007년이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1980년이라던데, 이건 그냥 일필휘지다. 대단하다. 어찌 이런 필력이. 이 작가는 정말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우리에게 뚝 떨어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작가 나이대에 겪을 만한 얘기들이 다다. 그럴 수밖에 그렇지만 결코 세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읽으면서 그땐 그랬지 하게 되니까. 신기한 건 이 나이대 작가면 다른 상상을 펼쳤을 텐데 그녀는 굳게 현실을 딛고 선다.
그녀가 쓴 소설의 배경은 대부분 도시의 변두리다. 삶이 때로는 우리를 비루하게 만들지만, 그녀는 이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는다. 통통 튄다. 그리고 웃긴다. 그건 그녀 문체 때문인데, 이건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봤어야 나올 듯한데, 그렇지 않으니 그녀는 엄청난 관찰력을 가진 게 틀림없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도도한 생활〉을 보면 생활의 궁핍을 가져온 건 분명 아버지일 텐데,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박하지 않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애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벌금은 고스란히 만두 가게서 일하는 엄마 앞으로 전가됐다"(P.22).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아버지를 탓하며 심하면 의절까지 했었을 텐데, 코믹하다. 그녀 다른 단편 〈달려라, 아비〉도 그랬던 것 같다. 무능한 것 같은데, 그 무능함을 위트로 처리하고. 삶은' 도도'해야 해서 피아노를 사준 게 아니었는데, 그저 피아노도 치지 못하는 지하방이라니.
〈침이 고인다〉. 껌을 씹으면 침이 고이는 게 당연한데, 이 껌이 그냥 껌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씹으면 씹을수록 상처가 기억되는 껌. 후배는 이 껌을 씹으며 버려진 도서관에서 엄마를 찾는다. 엉엉 울며 소리치지 못했을 그 상황이라니. 버려진 후배에 대한 연민. 그 연민도 누군가의 상처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력이 없다면? 내 마음이 이미 꽉 차 발을 들여 놀 자리가 없다면. 우린 그런 동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누군가 동정하고 상처를 보듬는다고 하지만 그 버퍼가 용량이 부족하다면? 아니지, 그 버퍼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면. 껌을 씹는 평범한 행위가 누군가에겐 상처를 기억할 트리거가 되다니.
〈자오선을 지나갈 때〉를 읽으면, 젊은 날이 마냥 행복하고 즐겁기만 했다면 그게 행복일까? "남자 친구가 대학 가서도 연락하자고 말할 때, "나는 우리가 대학 가서 연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노량진은 모든 것이 '지나가는'곳이기 때문이었다"(P.144). "4인실은 너무 좁아, 네 명 모두 책상 위에 의자를 올린 뒤 연필처럼 자야 했다"(p.128). 그렇게 대학 재수생, 임용 고사 재수생, 5급 공무원 준비생들이 모인 여성 전용 독서실도 한때 지나가는 곳이었다. 우리 청춘처럼 자오선처럼.
아련함은 <기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가 노량진이라면, 여긴 신림동이다. 여기 청춘도 앞의 청춘과 별다르지 않다. 노량진이 누군가에게 눈물 어린 밥을 먹던 공간처럼, 신림동도 교육행정직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겐 공간만 다를 뿐. 내가 막내와 작은 원룸에서 살지 않았다면 언니와 같이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나도 언니보다 나을게 별로 없다. 서울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는 것뿐. 언니가 "처음, 산 밑에 방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었다. "언니, 산 좋아하잖아." 언니는 멍하니 있다, 으하하 웃으며 내 머리를 쳤다(p.187).
〈성탄 특선〉하면 성탄절 특선 영화? 그랬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아저씨다. 여기선 섹스다. 언제부턴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성탄절 기간 동안 만나서 서로 즐기는 게 일상화된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방이 있어야 한다. 휴가철 방값이 하늘 높이 솟듯, 성탄절 기간 동안 방값이 솟는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녀, 아니 사랑하지 않아도 방을 찾게 되는데, 이건 '정상적인' 성탄절을 보내는 방법이다. 그렇게 찾다 찾다 찾아간 곳이 허름한, 이주 노동자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니. 진작 방이나 마련해 두지?
〈네모난 자리들〉도 방에 대한 얘기다. 앞에 방이 섹스를 위한 필수 공간이라면 이곳에서의 방은 그리움의 방이다. 좋아하는 선배가 머무는 방. 그곳엔 응당 머물러야 할 선배는 없다. 제목이 왜 '네모난 자리들'인가 했더니 방이 세모난 방이 있던가? 방이 원처럼 된 방이 있던가? 그때 그 방은 좋아하는 선배만 머물렀던 방만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방도 있다. 엄마가 '나'를 낳았던 그 방이기도 하다. 엄마와 함께 힘들게 찾아갔던 내가 태어난 방, 그 유년의 방. 그곳에도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플라이데이터리코더〉가 뭔가 했더니 이건 섬의 이름이다. 이 섬은 무인도가 아니다. 사람이 산다. 주인공은 섬에 사는 엄마 없는 소년. 할아버지는 어미 아비 없는 자식을 "싹수 있게' 키우는 것이 그의 오랜 바람이다. 그런 그곳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거기서 나온 블랙박스 하나. 그걸 삼촌은 그게 엄마라고 한다. 엄마라니? 그러니 소년은 블랙박스를 엄마처럼 대하는데, 외부 정보원이 그 블랙박스를 찾아 돌아간다. 다시, 항상 그렇듯 섬은 일상을 되찾고. 그들이 그 박스를 해독해서 얻어낸 대화라곤, '안녕.'
〈칼자국〉. 남자에게 칼은 누군가를 베는 역할이라면 여자가 아닌 엄마의 칼은 누군가의 생존을 위한 칼. 엄마는 20여 년간 맛나당에서 손칼국수를 팔았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갑작스레. 손칼국수 가게는 시골에서 여자가 소자본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로 인해 자식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 칼이 칼자루는 몇 번 세월 따라 바뀌었지만 칼날은 그대로였다. "날은 하도 갈려 반짝임을 잃었지만 그것은 닳고 닳아 종내에는 내부로 딱딱해진 빛 같았다. 어머니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p.153).
엄마가 갑자기 생각났다. 돌아가신 울 엄마. 이 소설 때문이다. 그때 울 엄마에게도 칼이 있었고, 작가처럼 그때 난 엄마의 새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