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2011). 저녁의 구애. 문학과 지성사
우연히 읽은 단편집 중 단편 '저녁의 구애'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검색을 했더니 위 그림이 나왔다. 단편소설인 줄 알았더니 회화였다. 작가는 프리스 쉬베리(1862~1939)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였다. 덴마크 인상주의 화가라니. 이참에 배워보지 하다가 작가 편혜영은 이 그림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소설 '저녁의 구애'가 써진 것일까?
또 편혜영? 또라고 한 것은 '또, 오해영'을 차용한 것이다. 2016년 방송된 드라마. 꽤 성공한 드라마라고 하던데, 전체 줄거리도 잘 모르겠지만 '또 오해영' OST 만큼은 꽤 좋군,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말인즉, 또 편혜영도 좋았다는 말도 될 것 같다. 역시나 편혜영. 그러고 보니 작가가 쓴 소설집 《아오이 가든》(2005), 《사육장 쪽으로》(2021), 《어쩌면 스무 번》(2021)을 읽고 느낀 점도 비슷했다. 한 가지만 빼면.
그녀의 소설은 읽고 나면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이거다. 이게 그녀가 좋은 소설가임을 입증할 수밖에 없는 이유. 우선, 그녀의 소설은 잘 읽힌다. 그런데 내 마음은 요동친다. 그러고 보면 좋은 소설은 편안한 소설이 아닌 것 같다. 아쉬움, 미련, 후회, 두려움, 공포, 좌절, 방황 등. 주인공이 뭔가 겪어야 한다. 작가가 이를 스토리 속에 멋지게 그려내면 성공한 것 같다. 단편 '저녁의 구애"는 정말 구애를 한다. 저녁에. 이게 소설을 읽다 보면 좀 뜬금없다. 근조 화환을 배달하는 남자. 그 남자는 친했는지 안 친했는지 친구의 부탁으로 근조화환을 배달한다.
근조 화환? 누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어야 오가는 것일 텐데, 여기선 그 대상이 아직 죽지 않았다. 병원에 가보니 아직 세상을 등지지 않은 사람을 위해 화환을 배달한다는 설정이라니. 그러면서 여자 친구에게 구애를 한다. 순간적으로 아님 내재된 일상을 벗어나려 구애를 하는데, 이건 죽음과 좀 반대되지 않던가. 구애는 조만간 생식의 시작이기도 하고. 죽음의 반대가 시작 아니던가?
'크림색 소파의 방'은 어딘가 아주 익숙한 플롯이다. 영화 같은 전개. 읽는 내내 불편했다. 파견을 끝내고 돌아가는 남편과 부인에게 새 도시는 꿈과 희망의 상징일 수도 있는데, 그들이 당하는 폭력과 그 집에 맞지 않는 가구는 잘 짜인 각본이지만 역시나 마음이 불편했다. 비가 오는 날 고장 난 차 와이퍼라니. 이삿짐은 도착해서 짐을 부리는데, 고장 난 차 때문에 부른 보험사 담당은 도착하지 않고. 여기에 폭행을 당하는 남자라니. 불행은 같이 몰려온다고?
승진을 위해 지방 근무를 해본 사람들은 일말의 기대를 하게 된다. 돌아가면 승진할 거라는. 그전에 그들이 겪게 되는 긴장감이라니. 거기에 아내는 임신을 한 상태고. 도대체 111번지는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 주인공이 답답함에 나선 '산책'은 끝이 보이지 않고. 보통 산책이라 할 때 단어가 주는 가벼움으로 인해 조만간 정상으로 돌려질 것 같은데, 소설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주인공은 자기 집 111번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대강 회계 담당은 숫자를 다루기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이다. 그런데, 감사가 나왔고 담당 이사는 그를 해외로 보낸다. 자발적 여행이라면 좋으련만 뭔가를 감추기 위한 작업. 그게 뭔지 모르지 주인공이 불안할 수밖에. 이러다 다 뒤집어쓰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닌지. 대게 회사는 희생양을 만들고 얼마 후 이를 보상해 주기는 하지만 불안하다. 어떻게 전개될지? 어려서 정글짐을 오를 때 느낀 두려움을 커서도 느껴야 하는 것인지. 우린 그렇게 조직 생활에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복사실을 운영하는 그는 매일 '동일한 점심'을 먹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가 먹은 점심의 반찬을 기억하지 못한다. 같은 점심이기 때문에. 그의 일상은 매일 같다. 같은 일이 똑같이 반복되는데, 어느 날 그 앞에서 누군가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 그의 하루가 달라진 것이다. 같은 식사, 반복되는 같은 일상, 그건 그가 복사실에서 하는 일과 똑같다. 복사. 하루도 그대로.
직장 상사가 물건 배달을 명한다. 그래서 두 명이 그걸 배달하러 떠난다. 지시는 다음 장소에 가야 이뤄진다. 두 명은 자루에 든 내용물이 궁금하지만 자루를 열어보지 않는다. 그건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윗선의 지시에 따라 물건만 배달만 하면 된다. 그건 현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그런 그들은 귀사를 택하지 않고 관광버스를 타고 떠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목적지는 어디든 관광지니까. 관광버스니까.
토끼는 키우다 맘대로 버려도 되는 동물일까? 역시나 주인공이 파견직이다. 그녀의 소설에선 '편안한' 직장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주인공이 토끼를 주워다 기르기 시작한다. 주워다 기르니 버리기도 수월할 터. 마음이 말이다. 그런가? 그녀 편혜영의 단편소설들은 대게가 이런 식이다. 읽고 나서 짠해지는 건 맞는 게 그 짠함이 감동의 짠함이 아니다. 짠한데 불편함. 선뜻 동의하고 싶지 않은 정서. 그럼에도 글을 읽는 이유는 삶이 그렇지 않다는 반항심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