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진짜 내 모습은?

오스카 와일드(2018).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위즈덤하우스.

by 길문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나를 봤는데 그게 내가 아니라면? 무슨 호러 영화 찍나? 도대체 나란 누군가 말이다. 나는 분명히 나긴 나인데 말이다. 그럼 거울에 비친 나는 정말 나일까? 앱이 있다. 이 앱의 목적은 남이 본 나를 보여준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나는, 나를 스스로 볼 수 없으니 거울을 비춰보는데, 이게 말이다. 남이 본 내가 내가 알고 있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눈에 낀 눈곱을 떼려 거울을 볼 때 거기에 있는 나는 반전된 나다. 이게 거울의 최대 약점인데, 사실 남이 본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나와 같은 다르지 않은 나긴 나다.


실제 반전되지 않은 거울을 시장에서 파는 것 같다. 굳이 나와 다른 나도 아닌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걸 그림으로 표현한 소설이 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소설에서 바질 홀워드가 그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분명 도리언이 본 얼굴이 아니라 화가 바질이 본 도리언의 초상일 것이다. 뭐, 직접 봤어야지. 소설인데! 실제 도리언을 얼마나 제대로 그린 초상화인지 이건 상상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느 책에서는 상상 속 도리언의 초상을 실물처럼 그려서 출판도 했던데, 주인공이 얼마나 잘생겼는지에 대한 상상이 더 좋은 것 같다. 소설의 원천이 상상인데, 주인공의 모습을 굳이 그림으로 그려서 출판해야 했을까?


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시인, 소설가. 뭐 하나 제대로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던 차에 이 책을 읽은 것이다.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많은 출판사에서 이 책을 낸 것으로 보니 역시나 한때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듯한 이름. 왜 그랬을까? 극작가라는 단어가 주는 힌트. 그래서일까?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들 간의 대화가 연극 대사 같다. 세상에나!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대화를 나누려면 꽤나 피곤할 텐데 말이다. 소설 스토리가 그냥 연극 한 편.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로 보건대 그는 말 많은 남자지만, 남한테 말도 많이 오르내린 남자라서. 생각해 보면 그가 남긴 많은 어록 중 한두 구절 정도는 기억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들. "젊을 때는 인생에서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고 보디 그것이 사실이었음을 알겠다"라던가. 결혼이란 필요에 쫓겨서 서로를 속이는 예술"이라던가. 소설 속 대사가 이렇게 냉소적인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건 소설 속 인물 핸리 애슈턴 경을 통해서 전달된다. 주로 남자나 여자와의 사랑을 묘사할 때 이런 문장들이 많이 반복된다. 이건 아마도 미남의 끝판왕 도리언과 미녀로서 결코 밀리지 않을 시빌을 묘사하고, 여기에 도리언은 세월이 가도 늙지 않고 청춘을 유지해야 여성들과 끊임없는 생기는 추문을 표현해야 하는 장치로써는 그만이다.


작가 오스카도 소설 속에 참전을 한다. 그가 직접 소설 속에 뛰어들 수 없으니 헨리라는 인물로 나와서 도리언에게 끊임없이 남녀 간에 벌어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 특성들을 설파한다. 어찌 보면 이런 펌프질로 인해 도리언을 더 타락하게 만드는데, 이런 것이 작가가 주창했다는 탐미주의에서는 내용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어야 소설의 미학적인 완성도를 높일 것이라고 주장할 것도 같다. 그럼 작가 스스로 도리언 그레이가 되는 것이었을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음과 청춘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도리언. 이런 소설을 쓴 것 보니, 바질 홀워드가 도리언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만 본다면 작가 오스카는 궁극의 아름다움이 주는 그 끝이 어떨지 알았을 것 같다.


한 멋진 청년이 있다. 너무나 잘 생긴 남자. 그러니 여자들이 여기저기 꼬인다. 여자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잘생기면 최고 인기남일까? 그가 평민이나 하인이었다면 주인공이 될 수 없을 터. 여기에 경제적인 안정도 갖춘 귀족이었으니. 파티를 벌이고 클럽에서 노닥거리면서 서로 눈 맞으면 즐기는 것이 유한계급이 할 수 있는 주 업무(?)인지는 모르겠지만, 더불어 사는 중에 남녀 간에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의문스럽지만, 이건 작가가 그렇게 살아온 것에 많이 기초할 것 같다. 당시, 동성애로 인해 고초도 직접 겪어봤던 작가였으니. 아무튼, 주인공은 자기 잘생긴 외모가 추하게 늙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 소원이 이뤄진다. 도레이는 살면서 탐욕과 추함을 드러내지만 그 몫은 온전히 초상화가 감내한다. 얼마나 영혼을 담긴 그림이기에 늙지 않는 젊음이라니. 대신 늙고 추해지는 초상화라니.


분명한 건 "감각으로 영혼을, 영혼으로 감각을 치유"(p.365) 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냥 타락한 젊은 청춘만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으니 도레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도레이 영혼을 초상화 액자 속에 담기게 한 화가 바질을 죽임으로써 연극처럼 클라이맥스를 선사한다. 이건 도레이의 영혼이 초상화에 남긴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바질을 제거해야만 아름다움과 청춘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는, 초상화는 추하게 변하게 된 것을 남한테 알려줄 수 없는 도레이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이런 동기 때문에 도레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초상화는 영혼이 빠져나가 젊은 도레이로 다시 그려지고, 그간 세월이란 흔적을 얼굴로 드러내고 죽음으로써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은 이렇게 끝나는데, 이젠 화장실 거울을 맘 편하게 들여다보며 면도를 하거나 세수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어느 날 거울이 내가 드러낸 분노나 슬픔, 고통, 절망을 드러내면 어쩔까 모르겠다. 그럼 호러 영화가 되겠지만. 아니다. 호러 인생이 되겠지만. 내 얼굴은 그냥 그대로라도 지금까지 내가 느꼈던 쓰레기 같은 감정이 배수구에 쓸려나가는 모습들이 거울에 보이면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사실은 감추고 싶었던 내 치부는 보이지 않음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남이 본 내 모습이라니 얼마나 다행일까? 오늘부터라도 이제 거울을 함부로 보지 못할 것 같다. 진짜 내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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