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 살아도 할 건 다한 사나이

이탈로 칼비노(2014).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by 길문

나무 위의 여자? 이건 상상이 안된다. 그렇다면 환상은? 그럼 나무 위의 하인? 이건 무슨 코미디 같다. 하인이 이성을 논하고 시대를 논하기에는 좀 그렇다. 그것도 배경이 18세기인데 말이다. 그럼 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감성보다 이성을 내세워야 했으니. 이건 왜일까? 나무 '위' 때문이다. 나무 위도 현실이긴 한데 직접 발을 디디지 않는다. 이걸 것 같다. 거리 둠. 세상과 거리를 둬야 말이 되기에. 그렇다고 세상과 분리나 고립은 아니지만. 그럼 작가가 원하는 바. 왜 남작일까? 어릴 때 외웠던 공후백자남(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그 시대엔 신분제였을 테니. 그런데 남작이라? 이건 잘 모르겠다. 공작이라면 신분이 너무 높아서였을까?


세상과의 거리는 딱 나무와 땅과의 거리였기에 그나마 귀족으로써 신분이 가장 낮아야 했을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는 198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나무 위라는 공간을 한정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기준을 정했으리라. 우주에서 본 세상? 이러면 너무 멀고. 동양에서 본 서양 하면 이러면 세상을 비꼴 수 없다. 상대적인 잣대가 돼버리니. 나무 위? 적당한 거리감. 그가 세상을 보고픈, 그래야 할 말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본 세상은 어땠을까?


코지모 디 론도. 소설의 주인공이다. 이 주인공을 묘사하는 건 동생인 '나'다. 이것도 거리감이다. 나와 형과의 거리. 형의 조력자. 형의 세상에도 아버지의 세상에도 속하지 않으니 이 또한 거리감인데 이것도 작가의 노림수일 것이다. 작가는 그냥 등장인물을 내세우지 않으니까. 땅인 현실에서 태어난 코지모는 결국에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스스로 난 건 아니고. 나무에서 생을 마칠 줄 알았더니 열기구에 달린 줄이 지나가니, 이들 조종사들은 영국인이다, 그걸 잡고 기구에 뛰어오르는데...... 그후 소식은 누구도 모른다. 어디선가 코지모가 죽었다는. 사람들 눈엔 땅에 내려와 죽지 않았다는 모습은 확실했지만. 그래야 극적이기도 하다.


12살에 누나가 만든 달팽이 요리가 얼마나 이상했길래 그게 원인이 될까? 어릴 땐 그럴 수도 있는데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은 이유로는 너무 약하다. 그러니 아버지가 필요한 거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체제. 귀족. 권위주의적이니 작가가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세상. 아버지 세계라는 현실. 코지모는 그렇게 자기 삶을 나무에서 시작해서 나무에서 끝낸다. 나무에서 자급자족이 어떻게 된다는 건 아주 내려놔도 좋다. 소설인데 뭘 못할까? 중요한 건 나무에서 세상과 무심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깊숙이 관여하고 산다.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니다. 형이 살아가고 떠나간 옴브로사. 그건 형과 나와 우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결코 고립된 삶을 살지도 선택하지도 않았다. 남작이니까 자신의 영토도 가지고 있었으니 비참한 농노들의 삶도 알 수 있었고, 그러니 그들을 위해 뭔가를 고안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그들은 결코 코지모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가 귀족이니까 가능한 거지만. 여기에 광풍처럼 불어닥친 정치적 혼란이라니. 19세기는 패배의 시대였나 보다. "나는 이 19세기, 출발도 좋지 않았고 계속 나빠지기만 하는 이 세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 알 수 없다"(p.330)니. 왕정복고의 그림자가 전 유럽을 감싸 모든 개혁자들이었던 자코뱅 당이나 나폴레옹 지지자들은 패배했다고 하니.


소설에선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벌어졌던 계몽주의,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집권, 다시 왕정 복귀, 여기에 이탈리아 계몽주의자들과 자코뱅 당원까지 시대를 관통하면서도 로맨스도 빼놓지 않는다. 그렇다. 나무 위에서도 산적과도 사귀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도 교류를 할 정도라면 정상(?) 적인 남자일 터. 비올라! 그녀가 빠지면 코지모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야 하니 나무 위에서도 사랑을 나누지만 코지모와 달리 그녀는 감성적이다. 이건 코지모와 다른 그러니 그들 관계는 이어지지 않는다. 코지모와 비올라를 연결하던 닥스훈트 오티모 마시모도 시간을 거스르지 못해 세상을 떠나고. 다들 세상을 떠나듯 코지모도 떠나고 비올라도 떠나고 마시모도 떠나고 작가도 떠나고.


누군들 자기가 산 세상이 없었을까? 세상과의 조우. 그게 나무 위던 나무 밑이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그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닌 남이 만든 세상일 터. 옴브로사. 이건 이상이면서도 현실인데,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소설에선 시대 배경이 18세기일 뿐. 역시나 그가 소설을 쓴 1950년대도 역시나 옴브로사이다. 1950년대 세상을 18세기로 그려냈을 뿐. 우린 모두가 각자의 옴브로사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든 사랑과 욕망과 꿈과 희망과 더불어 시대를 살아갈 터이고 살아왔을 것이다.


나무 위도 또 하나의 옴브로사. 그곳에서도 할 건 다하고 살다 간 사나이, 남작이 있었기에 공간과 시간이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린, 각자의 옴브로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 각자의 옴브로사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나아가 당신의 옴브로사는 무탈한지? 아니지. 내가 살아온 아니 살아갈 옴브로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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