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베트남을 여행할 때, 하노이에서 하루 패키지여행을 통해 닌 빈 항무아 지역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가이드가 루카였다. 여행지를 향하는 버스에서건 돌아오는 차 안에서건 그는 항상 처음 멘트를 레이디스 엔 젠틀맨이라고 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이런 뜬금없는 소리라니. 이탈리아. 그것도 토스카나 지방에 와서 엉뚱하게 베트남 가이드 루카를 생각하다니. 그만큼 루카에게 애정이 갔었다. 짧은 하루 여행이지만!
함께한 여행자들은 피렌체 역 앞에서 모였다. 역 앞 풍경
토스카나 하루 여행 끝내고 돌아와서 가이드를 생각한 건 여행이 좋았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그 가이드 이름이 정확하지 않다. 이탈리아인인 거야 당연하고. 엄마가 이탈리아에 유학 와서 이탈리아 남자를 만나 결혼한 후 자기를 낳았다는. 기억이 가물가물. 존 카를로스? 근거는 카를로스라고 했던 것 같아서였다. 반은 일본인 반은 이탈리아 사람. 나이는 40대. 남자아이 한 명을 둔 가장. 예약자 명단에 자기 아들 이름과 같은 글자가 있어서 놀랐다는.
카피돌리나 늑대상, 세계 최초의 은행과 설립자, 시에나도 골목이 예쁘다.
약속 장소는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이고, 시간은 오전 7시 45분이었다. 부지런히 서둘렀다고?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숙식을 해결한 장소가 역 근처여서 적당히 가보니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오늘 토스카나 일일 여행을 떠다는 다국적인들이 이렇게 많다니? 거의 10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어디서 이 인간들이 몰려든 것일까? 줄 뒤에서 가이드와 1차 명단을 확인하고 얼쩡거리고 있는데, 어떤 일행이, 할머니는 목발을 짚고 할아버지는 느긋한 표정으로 내 뒤에 줄을 섰다. 그들 노부부는 미국에서 온 캠퍼라고. 차를 타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돌고 있다는. 오늘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대화한 사람들이 그분들이었다.
가이드 카를로스와 미국에서 온 노부부. 피사의 사탑, 피사 세례당에서 노는 아이들.
50명 정도가 버스에 탄 것 같은데, 가이드의 이탈리안 영어를 다 알아듣는 것 보니 영어에 능숙한 사람들 같았다. 인도계로 보이는, 싱가포르 사람들로 보이는, 무심히 지나쳤던 몇몇 사람들 빼고 거의 다 백인인 것 같았다. 부부 혹은 가족 단위로 온 듯한. 오늘 일정은 시에나, 산지미냐뇨, 피사를 돌아보는 것인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카를로스가 오늘 와본 곳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봤을 때 피사가 꼴찌가 아니었다. 가이드는 약간 농조로 물어본 것인데, 답은 예상과 달랐다. 이건 가이드의 질문을 역시나 농으로 받은 것 같았다. 피사는 말이다. 그냥 피사였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넣은 것만은 아닐 테지만. 피사에서 주어지는 자유시간 내내 피사 광장 안 잔디밭에서 애들 물놀이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소일했었다.
피사 세례당, 두오모 파사드, 탑 앞 전경
탑에 올라갈 희망자도 적었지만, 피사는 평평한 대지 위에 하얀 대리석 건물 여러 채가 군데군데 놓여있는 듯한, 각각의 건물을 들어가는데 꼬박꼬박 돈을 받아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던 곳이다. 물론, 일부는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날은 덥고, 저마다 물통을 한두 개씩 들고 다녔던 하루. 나중에 지도를 보니 기껏해야 피사의 1/10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 1시간으로 워낙 짧기도 했지만, 아르노 강과 피사 대학 등 돌아다녔다면 제법 볼거리도 있었을 피사. 아쉬웠냐고? 전혀였다. 그냥 어디선가 봤던 피사의 기울어진 탑과 피사의 두오모를 겉으로만 봐도 충분했다.
시청으로 사용되는 푸블리코 궁전, 시에나 두오모 파사드. 시에나도 사람이 살고 있다.
결론적으로 토스카나 지방은 한국인들이, 가족단위로, 친구들과 함께 하건, 신혼부부들이건 많이 올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완만한 구릉과 그 구릉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마을들, 그곳 들판을 가로지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오래된 돌들로 이뤄진 도시 시에나와 산지미냐뇨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란말은 사족이다. 특히, 이 지역의 돌들이 사암이라서 그 질감이 건물에 적용되었을 때 토스카나 지방의 들판과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나중에 들른 아시시도 비슷한 감성을 불러일으켰지만.
로마에 있는 카나리나 성녀 석관과 산타마리아 미네르바 성당.
시에나는 토스카나 지방의 핵심이었다. 볼 것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인데, 그중에 백미는 시에나 두오모와 캄포 광장이었다. 독실한 신자라면 성녀 카테리나 생가를 방문할 테고, 로마를 거쳐 이곳에 온 이들이라면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서 그녀의 석관을 이미 보고 왔을 터지만. 시에나가 세계 최초의 은행(1472)이 있을 정도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십자군과 상인들과 순례자들로 넘쳐나던 이 도시가 피렌체와의 경쟁에서 밀리는 와중에 흑사병까지 돌게 되었다니. 그것이 지금까지 아름다운 도시로 남게 된 배경이라니.
캄포 광장과 가이아 분수. 9개로 나뉘는 광장은 경사가 져서 배수가 자연스럽다. 이 광장에서 팔리오 경주가 열린다.
캄포 광장은 조개 모양 혹은 부챗살 모양으로 9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는데,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칭송받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 건물들과 조화롭다. 이곳에서 일 년에 두 번 경마경기인 팔리오가 열린다는데, 지금은 시청사로 쓰이는 푸블리코 궁전에 깃발이 날리고 사람들이 응원을 하기 위해 몰려든다는 생각만으로도 캄포 광장이 얼마나 시에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인지 상상이 된다. 완만한 경사로 배수까지 고려하고, 그곳 중앙에 가이아의 분수까지 배치를 하다니. 다른 무엇보다도 기울어진 광장이라? 이곳에 누워 언젠가 해맞이할 날도 다시 오겠지만. 여름엔 말고. 궁전을 지울 때 깔 맞춤 한 것 같은 만자탑은 캄포 광장의 또 다른 별미(?)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피콜로미 재단, 니콜라피사노의 설교대, 발사데레 펠루치의 청동제단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의 각축은 정말 심했나 보다. 최대의 바실리카를 만들려는 노력이 실패해 미완성인 시에나 두오모에 남겨진 그 슬픈 사연은 어디 가고, 성당 내부 줄무늬 기둥과 벽, 천장과 대리석 바닥까지 이 고딕 성당에도 도나첼로,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등의 작품들이 숨결을 불어넣고 있어 누군가에겐 이탈리아 최고의 성당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생각해 보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비교를 하지 않던가. 어디가 어디보다 더 좋다는. 워낙 성당이 많아 그 숫자만큼 스토리가 넘쳐나는 이탈리아에서 느낀 건 비교불가. 어느 성당이건 당시 신을 향한 열망과 믿음이 덜 담겨 건축된 성당이 어디 있을까?
시에나 두오모가 다른 지역 두오모와 다르다는 증거.
반복하지만 시에나 두오모를 역시나 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흑백의 줄무늬인데, 이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흰 연기와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린데 기원한다고 한다. 이것이 어쩜 누군가에게 가장 인상적인 성당으로 자리 잡게 하는 요인이며, 베르니니가 만든 황금을 상징한 돔 천장과 다른 어느 곳에서 볼 수 없는 상감기법의 대리석 바닥과 미켈란젤로, 니콜라 피사노의 작품 등이 절묘하게 어울려 베니스와 피렌체, 로마의 어느 성당에도 뒤지지 않을 걸작인 건만은 확실하지만. 역시나 이 또한 인간이 만들었다는. 비록, 피렌체에 밀리긴 했어도 시에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성당이다.
시에나 병원이었던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와 시에나 두오모 성당 바닥. 이게 예술 작품이다.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피사와 함께, 이곳 토스카나 역시 대충 둘러보고 떠나지만. 피사 또한 당시 시에나, 피렌체 등과 엄청난 경쟁을 벌인 도시라는 것을 넘어서, 짧은 여행을 통해, 시간 혹은 세월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물임을 확인하더라도, 신에 비해 부족할 인간들이 만든 걸작들을 보고 다니는 호사를 누렸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곳 토스카나 어디에도 내가 이곳을 왔다갔다는 흔적이 남지 않겠지만. 인간이 그렇게 경외했던 신을 향한 열망과 어쨌거나 현재 남겨진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단 하나. 지나가는 순간과 다가오는 시간들을 그저 즐겼으면 하는 바람. 이것이 짧은 생을 사는 인간이 유일하게 시간과 세월에 복수하는 방법 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