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0유로. 벌금이었다. 조금 더 신중했으면 내지 않아도 될 금액. 크게 보면 큰 액수. 작게 보면 적은 액수. 씁쓸하지만, 이것으로 끝났을까? 이것 말고 더 큰 금액을 잃었음에도, 실물의 돈이 아니지만, 난 왜 지난 일들을 미화하는 단계를 넘어 아주 만족하고 있을까? 이건, 내가 돈이 많거나 관대해서가 아니었다.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실수를 했는지.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만, 이 단점만 보완하면 나도 제법 쓸만한 여행가가 될 것 같다는. 이렇게 실수해서 배운 교훈은 내가 지불한 손해 보다 더 컸을 거라고 굳건히 믿는다.
산 마크코 광장 앞 버스 정류장 중 하나
사람은 자기 합리화에 아주 능통하다. 이건 뇌가 이러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뺏긴 돈이나 잃어버린 물건은 다시 찾거나 사면된다. 그런데 이렇게 얻은 교훈은? 다 지난 일이지만, 내가 만약 베니스 산타루치아 역에서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로 떠나는 08:05발 기차를 타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아득하다. 지금 생각해도. 계획된 여행이 모두 바뀌지는 않더라도, 많은 계획들이 틀어져 예상과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것이다. 그중에서 경비도 한몫 차지하리라. 7월 이탈리아 날씨가 더운 것처럼 성수기 이탈리아 교통 요금도 기온만큼 많이 오른다. 비교적 일찍 이딸로 비즈니스석을 끊었기에 벌금으로 낸 59.50유로를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위로한다!
리알토 다리 주변 수상 버스 정류장
이건 정말 합리화지만. 만약 그때 다음 기차들이 만석이었다면? 그럼 다음 일정은? 그냥 발만 동동? 해외에서 이런 일을 겪었으니 그때 받는 스트레스는 아마 두 배 이상 올라갔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베니스 핫플 중 하나인 리알토 다리
처음 타는 기차를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역에서 놓칠 경우, 그것도 말도 잘 통하지 않은 외국이라면 어땠을까? 아찔하다. 떠나기 전 이탈리아 철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었다. 철도 파업이 수시로 이뤄지고, 열차는 출발과 도착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는. 여행을 위해 깔아놓은 트랜 이탈리아 앱에서 간혹 알림이 왔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는. 그런 이딸로가 웬일인지 베니스 역에서 정시에 출발했다. 이것도 배운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는. 기차가 그 철도역에서 떠나는, 이미 기차가 그전에 와있었다면 그 기차는 예정대로 출발한다. 이런건 선입견이다. 역시나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 역에서 8시에 아시시로 떠나는 기차도 정시에 출발했었다.
베니스 대중 교통
시작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였다고 해야 할까? 새벽에 일찍 배낭을 정리한 후 둘러매고 나온 시각은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숙소에서 산타 루치아 역까지 두 번 이상 왕복할 정도로 시간이 충분했다. 그럼에도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걸 복기해 보면 내가 처음 기다린 버스 정류장은 B였다. 옆에 A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 사실은 정류장 A와 정류장 B에 서는 배는 회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첫 번째 몰랐던 점이다. 두 번째 몰랐던 점은 A에서 떠나는 배는 완행이고 B에서 떠나는 배는 급행이었다. 같이 산 마르코 광장에서 떠나서 역으로 가는 버스(배)라고 해도 걸리는 시간이 두 배 정도 차이가 났다. A에서 떠나는 배는 당연히 정차하는 정거장이 두 배 이상 많았다.
곤돌라 정박지
전날 그 유명한 그랜드 커널(베니스 운하)을 구경하고 베니스 역까지 어떻게 갈지 궁금과 걱정 반으로 사전에 테스트를 했었다. 운하는 역시나 아름다웠지만, 이 준비가 오히려 독이 될 줄은 그때 몰랐었다. 새벽 일찍 광장 앞 B 정류장에 갔을 때 물었었다. 여기서 다음에 오는 배가 역에 가냐고. 그때 정류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그랬다. 간다고. 그런 후 몇 시에 가냐고 물었는데 손발 다 동원한 몸짓을 잘못 이해했다. 시간이 오전 6시 정도 정류장에 도착했으니 그 사이 역에 가는 버스가 한대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배편 시간도 확인했는데,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고, 시간도 잘못 확인한 것이었다. 원래 생각은 오전 7시쯤 배를 타고 7시 30분쯤 역에 도착해서 8시 5분에 떠나는 기차를 타는 거였다. 이건 계획이었다.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7시가 지났는데 배가 오지 않아 초조해졌다. 아까 물어본 남자한테 숫자로 물어보니, 7시 30분으로 적는다. 맙소사!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30분 정도 걸리는 배를 타고 역에 도착해서 바로 기차를 탈 수 있을까? 불안했다. 다시, 남자한테 가니 매표소로 가란다. 영어가 가능하다고 했던 것 같아 매표소에 가니, 그때 문을 연 매표소 직원이 뭐라고 한다. 옆 터미널 A에서는 매 13분 간격으로 배가 역으로 간다고.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먼저 몸이 반응했다. 배낭을 둘러메고 옆으로 뛰어갔더니 회전식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가까스로 밑으로 구르다시피 굴러 배로 갔더니, 배 앞 승무원이 이 배는 안 가니 뒤에 배를 타란다. 뒷배? 뒤에 배가 왔는지도 몰랐다. 역시나 몰랐던 세 번째 사실은 A와 B로 나뉜 정류장이 각각 다시 두 개의 정류소로 나뉘는데, 가는 배는 방향만 같을 뿐 행선지가 다르다는 것을.
아카데미아 다리에서 보는 석양
다시, 배낭을 들쳐 매고 옛날 배운 각개 실력을 발휘해 굴러 뒤에 있는 배에 달려갔더니, 그 배가 역에 가는 배가 맞긴 맞았다. 이때까지 그나마 순조롭게 무사히 역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정류장 수를 세어보니 내가 어제 탔던 배와 달랐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다른데? 배는 똑같이 보였는데, 정류장 수는 배 이상이 많고, 배 또한 정말 천천히 갔다. 나쁜 머리로 정류장 간 시간을 2분으로 잡아도 8시 전에 역에 도저히 도착할 것 같지 않았다. 생각과 맥박이 동시에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차를 놓쳤을 때의 가능한 모든 수을 생각하는데, 수가 없어서 포기하던 와중에 불행이 극성스럽게 달려들었다.
곤돌라
어제는 그렇게 멋지던 리알토 다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어제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고 내렸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지 하고 생각하면서, 출근 시간 때문인가 하고 답을 내리고 있던 찰나, 똑같은 복장의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눈에 띄었다. 그 악명 높은 검표원들이었다. 이들이 내게 다가올 때도 난 뭔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이른 아침 자판기에서 산 8유로 빨간 배표를 들고난 무심한 척 앉았는데, 그중 여자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짧은 영어로 나한테 한 말, 네가 가지고 있는 표는 B 회사 표라는 것이다. 이 배는 A 회사이고. 그러니 넌 표 없이 공짜로 탔으니 벌금을 내라고. 59.50유로.
아카데미아 다리 밑으로 보이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이런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으면, 뻔히 외국인 여행객이 배를 잘못 탔으니, 거의 익스큐즈 하고 넘어갔을 것 같았다. 아니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슈퍼 비지 도시(super busy city) 베니스 검표원들이었다. 인터넷 어디선가 이들은, 베니스가 아닌 다른 이태리 도시에서도, 어디서든 결코 예외 없이 벌금을 때린다던데, 걸린 게 나였다. 배 안에서 도망갈 수도 없고, 기차를 놓칠까 봐 혼미한 상태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주 빨리 신용카드를 주면 아주 빨리 되받을 줄 알았다. 배가 아플 새도 없었다.
산 마르코 성당과 광장
그때, 얼핏 봐도 시간은 이미 8시를 넘어섰다. 여기서 하나 더. 어라? 어제 내가 연습 삼아 와서 내린 정류장 위치가 아니었다. 맙소사! 예상했던 곳 보다 더 앞에 가서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있었다. 내 머릿속은 돈이 얼만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절박함!! 오로지 기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그런 내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도 큰 소리로. Hurry Up! Hurry Up!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글이 벌써 다 끝나가는 것으로 보니 기차를 타긴 탄 나 보군! 신기한 건, 그때 내가 배낭을 메고 그렇게 빨리 달릴 줄 몰랐다. 그것도 역으로 뛰어들며 전광표를 한눈에 피렌체 발 이딸로 기차 플랫폼까지 확인을 하다니. 정말, 자랑스러웠다! 내 몸이 이렇게 빨리 반응하다니. 칭찬은 계속되었다. 떠나는 기차 안에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잘 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