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잖은 연민을 넘어.

천선란(2020). 천 개의 파랑. 허블

by 길문

같잖은 연민(?) 때문에 스스로 폐기된 휴머노이드가 있다. 이름은 콜리. 브로콜리의 그 콜리. 경주마 투데이 때문에 한 번 낙마를 하더니 다시 투데이를 위해 두 번째 낙마를 한다. 첫 번째 낙마를 할 때 자기가 복구될 것이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두 번째 낙마를 할 때는 아예 복구가 되지 않을 걸 알면서 낙마를 한다. 정말 "같잖은 연민"이다. 휴머노이드가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연민까지 보인 걸까? 그것도 살아있는 말한테 말이다.


굳이 휴머노이드 콜리가 다시 망가져 복구가 되지 않아도 소설은 예쁜 결론을 맺었을 텐데, 콜리는 스스로 망가진다. 중요한 건 이걸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처음과 같이 투데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러니 휴머노이드 콜리는 단순 휴머노이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콜리는 세상을 떴다. 아, 이것도 연민일까? 휴머노이드가 폐기된 걸 세상을 떴다고 하다니. 정말 같잖은 연민이다?


프로그램이 입력될 때 천 개의 단어만 입력된 콜리는 그 단어 모두 하늘 같은 느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 하늘이란 건 그냥 파랑 파랑하고 눈부신 그것 말이다. 그러니 좌절, 시련, 슬픔 등도 결국 파랑 파랑일 텐데, 그러니 다행인 것도 같지만, 그가 알던 사람들에 대해 느꼈던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으로 표현할 수 없는, 아니 그런 단어들을 섞어 그들을 표현하지 못하니 아쉬움으로 남았을 것 같다.


경마의 경주마는 빨라야 한다. 빨라야 이기니까. 느린 경주마는 경주에 필요 없다. 경주에서 도태된 경주마는 경주에서 도태된 사람보다 그 말로가 혹독하다. 말이라서 연민이 작동되지 않는 걸까? 과학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2035년부터 기수가 휴머노이드로 바뀐다. 기수가 가벼워지니 말들이 더 빨리 달려야 했다. 이건 그만큼 경주마가 빨리 소모된다는 걸 의미한다. 합법적인 도박이라 상대적으로 말에 대해 관심이 적을까? 우린 경주에서 사라진 말들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 잘 모른다. 지금도.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낙마를 한다. 이러니 폐품이 된 것이고. 그러니 폐기되어야 하는데, 우연히 연재의 눈에 띈다. 로봇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은 그로 인해 콜리는 재생이 되는데, 이렇게 재생된 콜리가 다시 투데이와 나선 경주에서 다시 낙마를 선택한다. 다시는 복구될 수 없음을 알면서. 그건 전적으로 투데이가 본능으로 빨리 달리려는 걸 막기 위해서다. 휴머노이드가 말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이건 같잖은 연민이 아니다!


첫 번째도 투데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두 번째도 투데이를 보호하기 위해서인데, 상황이 달라졌다. 전자는 경기 중에 그런 것이고 후자는 경기를 위해 그런 것이다. 특히, 후자는 투데이가 뛸 수 있음을 입증해야만 해서였다. 경기에 나설 수 없으니 폐기될 운명인 투데이를 위해 뭉쳤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어떻게든 경주에 참여시켰는데, 콜리만 결국 사라진다. 결말에선 투데이가 폐기되지 않으니 해피엔딩 같지만, 투데이를 위해 그저 헌신한 콜리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연재는 로봇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 그가 어느 날 경마공원에 갔다가 폐품으로 전락할 휴머노이드 콜리를 발견한다. 폐품이야 흔한 세상에서, 콜리가 경기 도중 하늘을 바라보다 낙마를 했다기에 콜리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그때 콜리는 C-27로 불렸다. 연재에겐 언니 은혜가 있는데, 그녀는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세상과 조우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친구는 동생 연재도 엄마 보경도 아니다. 경기에서 혹사되어 곧 사라질 투데이. 이건 동병상련을 넘어선 우정이다. 엄마 보경은 남편이 없다. 남편을 사고로 잃고 딸 둘을 키워야 하는 싱글맘. 삶이 고되다. 돈이 많으면 은혜에게 최상의 다리를 마련해 주련만. 가난으로 딸보다 생계를 선택했다. 세 가족이 먹고살아야 하니. 그게 후회스럽다......


소설이 아름답다. 휴머노이드 콜리를 통해 인간들이 서로 연대와 사랑을 나눈다. 그 교감을 통해 세상이 파랑 파랑하고 눈부심을 보여주기에, 그러니 성공했지만, 그곳에 콜리는 없다. 까짓것 휴머노이드가 사라진다고 달라질 것 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가 묵묵히 견뎌낸 습작 기간이 얼마나 진중했는지 알 것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간을 얼마나 섬세하게 표현했는지 감탄스럽다. 아프고, 슬프고, 아련한 지난날 어느 순간을 떠올려준 정말 고마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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