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2010). 녹턴. 민음사
사는 것이 밍밍한지 자극적인지 알려면 어느 정도 살아봐야겠지? 나이가 들어야 알 수 있는 건데, 주변에서 사는 게 뭐 별게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는 것이 밍밍한지 자극적인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살아봤다는 것인데, 사는 건 정말 밍밍한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보다 젊을 때 자극적인 것에 마치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늙어봐라? 이런 소리 귓전에 생생하지 않던가!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만으로 선뜩 손이 갔다. 손이 가요, 손이 가~ 끝은 새우깡이 있는데, 손이 가서 닿은 책이 말하는 인생은 밍밍했다. 정말, 그날 누구든 맞이하는 인생 끝엔 뭐가 있을까?
'남아 있는 나날'이 맞는 건지 '그날의 흔적'이 맞는 건지. The Remains of the Day 말이다. 앤서니 홉킨스가 나와 명품 연기가 뭔지를 보여줬던 그 영화를 본 후 소설 못지않았다는 칭찬 때문에 가즈오 이시구로는 머리 나쁜 내가 기억하는 명작 소설가였다. 그것 때문에 쉽게 손이 나간 건데, 읽고 나서 생각난 단어가 바로 밍밍함이었다. 엄청난 다작 작가인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일곱여덟 권 정도의 소설을 쓴 작가로 노벨 문학상과 부커 상을 거머쥔 대가이다. 가성비 죽인다?? 암튼, 소설을 읽고 나서 시간이 좀 지나니 뭔가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 이건 밍밍함이 아닌데,라는 생각 말이다.
소설집 제목이 녹턴(nocturne)이다. 벌써, 제목이 먹고 들어간다. 야상곡!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밤에 어울리는 음악이라!! 그러고 보니 부제가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이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다던데,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음악을 위해 불행한 건지, 문학을 위해 다행인 건지. 우선, 다행이라는 방점에 초점을 두자면. 남아있는 나날(1989)처럼 뭔가 아득한 더 이룰 게 있을까 하는 미련 혹은 아쉬움이 이 소설집에도 기저에 깔려 있다. 그가 소설에서 말하는 음악은 잘 모르겠지만 그가 보이고픈 황혼이란 단어는 알 것도 같다. 나도 살았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소설에 깔린 배경음악이 있다면 딱 이럴 것 같은 느낌. 애잔함??
크루너.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가봤기 망정이지, 가보지 못한 사람은 좀 와닿기 어려웠을 것도 같은. 크루너(crooner)라기에 사람 이름인 줄 알았더니 작게 부르는 창법이라니. 일단, 넘어가자. 그곳에 기타리스트 얀은 크루너 가수인 토니 가드너를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발견한다. 얀의 엄마가 좋아했다니, 이건 그가 한물갔다는 말이다. 얀은 아직 가능성이 있는 밴드 기타리스트였을까? 그와 안면을 트고 나서 가드너는 그의 아내와 헤어지기 위해 이별 여행을 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부탁한 건 곤돌라를 타고 운하에 나가 아내 린디를 위해 기타를 연주하고, 가드너는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것. 그 작은 이벤트가 성공을 했으니 가드너 부부는 이혼을 했겠고, 그때 들은 그의 아내 린다의 인생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얀에게 추억만 남긴 체.
비가 오나 해가 뜨나. 제목에서 쉽게 연상되는 이미지? 영어강사 레이먼드는 자기 동창 커플의 집에서 휴가를 가지려고 한다. 친구 찰리는 아내를 챙겨달라며 자기는 출장을 떠나고. 친구의 친구인 에밀리 또한 레이먼드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작은 사건이 생기는데, 그가 에밀리의 수첩을 몰래 들여다본 것이 발단이다. 뭐 별것도 아닌 사소한 내용에 대한 부담감을 잔뜩 심어준 건 친구 찰리. 그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였다. 찰리한테 말려든 것일까? 살 만큼 같이 살아본 부부관계라는 것이 그리 살갑지 않은데, 괜한 걱정으로 수첩에 남긴 흔적을 없애려다 이를 에밀리가 알게 된다. 친구면서 남편이 없는 사이에 친구 아내와 무슨 섬싱이 벌어질 줄 알았더니, 이런 밍밍함이란 대체 뭘까?
몰번힐스. 기타리스트이면서 싱어송라이터인 주인공은 젊고 재능이 있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런던에서 밀려나지 않고 성공하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누나한테 의탁하려 한다. 잠시 동안만. 누나는 몰번힐스라는 곳에서 카페를 경영하는데,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카페에서 일을 해주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으로 스위스인 둘이 오는데, 그들 이름은 틸로와 소냐이다. 그냥 스칠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잠시 카페를 떠나 언덕에 올라갔던 날, 그곳에서 그는 기타로 노래를 작곡하며 연습을 하는데, 이걸 틸로와 소냐 부부가 알아본다. 몰번힐스에 관광 온 이들은 알고 보니 생계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프로 뮤지션이었던 것. 이러니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고. 주인공은 자기가 만든 음악을 들려주며 인생까지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이야기.
녹턴. 스티브는 재능이 있으나 성공하지 못했는데 그건 외모 때문이라고 아내 헬렌도 그랬고, 매니저도 그랬다. 성형수술받으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 그런데 돈이 있어야지. 아내가 떠나면서 새로운 남자친구한테 스티브를 위해 돈을 제공하라고 한다. 글쎄, 아내가 바람난 것인데 미안해서 그런 것인지 성형수술과 회복 비용을 부담한다니. 이건 장땡을 잡은 것일까? 수술이 성공한 후 회복을 위해 일급 호텔에 머무는데, 옆방에 옛날에 유명했던 가수 토니 가드너의 이혼녀 린디가 머물고 있다. 전처 린디는 무슨 이유로 성형수술을 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얼굴에 붕대를 둘둘 말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친해지다 휑하니 서로 헤어진다. 흠, 도대체 이런 싱거움이란. 그나저나 나중에 설령 그들이 다시 만나도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겠지? 서로 말이다. 수술 전도 모르고 수술 후도 모르니.
첼리스트. 소설에선 대게 우연히 누군가를 만난다. 여기선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티보르다. 그로 인해 시계는 7년 전으로 돌아가고. 티보르는 런던 왕립 음악원에서 공부한 후 빈에서 2년 동안 올레그 페트로 비크를 사사했다는데, 대게 음악가들이 그렇듯 티보르도 생계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게 된다. 나와 함께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스스로 첼로의 대가라는 미국 여자 엘로이즈 매코믹을 만나는데, 이 자칭 대가는 실제로 첼로의 대가는 아니다. 그런 그녀가 티보르를 가르치다니. 그녀가 실제로 열한 살 이후 첼로를 연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암스테르담의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그러다 다시 나를 만난 건데, 그가 걸친 옷차림이나 외모로 볼 때 크게 성공한 것 같지 않다.
이러니 밍밍한 소설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 것이다. 어떤 주인공도 화려하게 성공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좌절해서 슬픔에 빠져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그렇다고 절망이 분위기를 잠식하지도 않고, 어떤 가능성으로 완전한 희망을 보여주지도 않는 내용들. 뭔가 앙꼬 빠진 찐빵 같은 소설 세계가 그의 작품 세계라는데, 그렇구나. 대가는 이렇게 소설을 쓰는구나,라고 받아들이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은 소설?? 이것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세계라니. 그럼에도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 어떤 묵직함을 느끼게 만든 건......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