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 정유정(2013). <28>. 은행나무
서양화와 동양화의 차이는 뭘까? 둘 다 회화다. 그래서 서로 친구인데, 둘이 같이 세워두면 친구 같지 않다. 친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서양화는 자연에 대한 해석에서 동양화와 달라진다는데 그게 뭐더라?? 재료를 보면 서양화는 종이, 캔버스, 수채화, 유화, 붓 등을 사용하고, 동양화는 화선지와 비단, 먹 등을 사용하는 것은 알 것 같다. 결론. 친군데, 느낌이 서로 엄청 다르다.
정유정의 소설 <28>을 읽고 난 소감을 말하는데 웬 미술?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미술에 대해 잘 모르면서 말이다. 소설가 정유정이 엄청난 작가라는, 과장이 아닌 한국을 대표할 수도 있을 작가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그녀를 평하는 게 능력 밖이고 이 글의 목적이 아님에도, 미술을 거들먹거린 이유는 느낌, 결국 질감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 말이다.
지금까지 <내 심장을 쏴라>, <히말라야 환상방황>, <7년간의 밤>, 그리고 <28>을 읽고 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게, 아니 몰랐다는 게, 그저 그런 독자의 한 명이었으니... 사람마다 성향이 다 달라서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당연히 다 다른 거야 당연하다. 그래서 지나치게 가볍거나, 읽고 난 후 뭐지? 란 생각이 든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이 아니다. 이런 소설을 읽다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 시간이 아깝다. 소설이니까.
거기에 성의 차이가 드러나는 글들이란 답답함을 넘어 편견을 가져온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작가들에 실망하던 차에 이 작가를 만난 것이다. 여성인데 말이다. 누군가는 이 작가가 남성스럽다고 말하나 보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는데... 글쎄, 여성스럽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지만, 남성이나 여성을 떠나, 보편적인 인간이 갖는 감성을 건드리는 게 좋은 소설 아닐까? 본성, 혹은 본질. 그게 뭔데 하면 답이 쉽지 않지만, 작가가 쓴 소설을 읽다 보면 그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모르겠다. 잘 쓴다는 말이다.
작가의 소설 대부분이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성들을 건드린다. 생존게임 같은 그래서 스릴러 냄새가 나는, 그래서 그녀는 장르 작가인가? 잘 모르겠다. 책들이 스릴러 인지도 모르겠고. 단지, 아쉬운 것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 시대가 주는 울림이나 아픔 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최애 작가는 아닌 것 같음에도, 이 정도 내용과 깊이를 치밀한 학습을 통해서 구성해낸다는 게 어느 책을 읽던 후회가 없다. 아직까지.
서울 인근 화양이란 가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치사율 100%라는 인수공통 전염병, 생각하기도 끔찍하지만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이 더 끔찍하다. 인간들이 비록 극한 상황이라도 이렇게 각각의 인물들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을 계속 생각나게 한다. 기자 윤주가 쓴 기사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수의사 재형이 주인공인 줄 알았더니, 그도 죽고. 응급실에서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던 간호사 수진도 죽고. 애초에 악으로 설정된 동해와 그 가족도 죽고. 여기에 기준의 가족도 죽고. 시각장애 어린이인 승아까지 죽고. 여기에 화양을 봉쇄한 군인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도 죽고.
여기에, 사람 못지않은 주인공들인 개 링고, 스타, 쿠키, 마야 등 많은 개들도 죽는다. 그런데, 읽다 보니 개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소설이라니. 개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는 별개라도 비극적인 내용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는데 한목 이상 단단히 한다. 그러고 보니, 28일 동안 벌어진 일을 나타내느라 정신없이 읽히는 것처럼 시간이 전개되는데, 이는 7년이란 시간 동안 벌어진 <7년의 밤>보다 호흡이 빠르다. 더 비극적이고. 시간 때문이었을까?
읽으면서, 구제역으로 인해 죽어간 동물들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은 알겠는데, 참혹한 내용을 담기 위해 1980년대 광주를 차용한 것은 계속 신경을 거슬렸다. 왜 그랬을까? 이 소설이 인간 군상들 내면에 자리 잡은 악마성을 드러내는데 적절했지만, 그 사건들이 미치는 시대에 대한 관심은 작가의 관심 밖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설들이 소설로써 부족할까? 작가의 역량을 논하는 것 역시나 사족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정유정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서양화 중에서도 유화 같다는 것이다. 워낙, 촘촘히 인간들을 묘사하기에 애초 동양화일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미술 또한 문외한이라 조심스럽지만, 유화를 보면 끊임없이 물감을 입히고 덧칠하지 않던가. 그런 느낌이다. 그녀의 소설은. 여백은 별로 없고, 끊임없이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치밀한 구성과 서사. 그래서 글을 읽고 나면, 아주 멋진 유화를 그린 화가가 나 이런 그림 그렸어하고 그림 옆에서 웃고 있는 작가가 연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