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2025). 사탄탱고. 알마.
본 투자에 대한 최종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본 영상(또는 콘텐츠)은 단순 정보 제공 및 교육 목적이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는 당신은 투자자이거나 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맞을까? 맞겠지?
재테크 시장에서 구원은 돈이다. 돈이 나를 구원할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재테크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데, 이 믿음은 남에게 책임을 귀속시킬 수 없다. 불문율이다. 내 탓인 것이다. 잘되면 내 탓이고 안 돼도 내 탓이다. 뭔가 종교와 다른가? 성직자들이 당신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그 한마디로 찍소리를 낼 수 없다. 뭔가 켕기는 건 절대적인 믿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측정하지? 사이비 종교에서 그걸 효과적으로 이용하는데, 단지 차이는 종교에서 구원은 전적으로 믿음과 비례하지만, 재테크 시장에서 구원은 꼭 믿음과 등가도 아니고 비례하지도 않는다. 믿는다고 믿기 위해 돈을 더 들여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믿음이 약하니 구원에 이를 수 없어 돈을 받쳐서 믿음을 사고, 더 많은 돈을 받칠수록 믿음이 커진다고 믿으면 구원도 확실할 거라고 믿을 수 있다. 반면에 돈이 날 구원한다고 믿기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그 돈이 더 많은 돈으로 불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건 종교와 다른 것이다.
여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그들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살던 집단농장 마을을 떠난다. 그들에게 돈도 바치고. 반대로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입장에서 보면 그들을 구원해 줄 돈줄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들을 구원해 줄 거라는 그 믿음에 기초할 것이란 걸 안다. 사기꾼들이 잘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던가. 사기꾼 중에서 종교를 파는 분(?)들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희망이 없다고 믿는 이들에게 종교는 믿음의 차원이라서,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하는 건 힘들지만 그 단계를 넘으면 사기 치기 좋은 것이다. 그런데 모든 믿음이 그렇듯이, 이게 영원하면 좋으련만, 집단농장 사람들도 자기들이 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생각을 하긴 하는데. 누구도 그들에게 신테크의 신조인 '본 믿음에 대한 최종 판단과 책임은 믿는 자 당신에게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그들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후터키, 슈미트 부인, 슈미트, 크라네르, 크라네르 부인, 헐리치, 헐리치 부인 등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사기를 당하는 피해자이다. 돈에 대한 욕심을 보이기는 하나 더 많은 돈을 탐내다 사기를 당하는 건 아니다. 자기들 구차한 삶을 구원해 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에게 돈도 자발적으로 받치고, 자기들 삶이 더 구차해지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구원에 매달려 집단농장까지 떠난다. 하기야, 구원을 바랄 정도라서 집단농장까지 떠난 거지만. 떠나기 전 이들이 술집에 모여 춤추는 탱고를 작가가 굳이 보여주는 건 탱고가 주는 열정 때문인데, 현실은 그와 반대라서. 그들 앞에 놓인 인생이 주는 비참함을 보여주는 장치라서. 그러니 사탄탱고라는 제목이 탁월하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란 단어가 있었다. 재건 혹은 개혁이라 불리는 이 단어가 마이동풍이 되었음은 오늘날 러시아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대내적인 것이고, 대외적으로는 긴장 완화와 군축 정책으로 인해 동구권에 몰아닥친 변혁과 냉전을 종식시킨 인류사에 획을 근 큰 사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체감이 된다. 그러니 궁금해진 건, 소설이 1985년에 씐 것이라고 하니, 작가 라슬로는 그 후 자기 모국에서 벌어진 변화를 어떻게 기술할까? 소련이 해체된 건 1991년이라서. 집단농장조차 벗어나 구원을 찾아 떠난 그들 그 이후 삶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소설 속 인물들에게 벌어진 사건을 유독 냉철하게 기록한 의사는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빙의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니 그 후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소녀 에슈티케가 죽음으로써 이리미아시의 사기가 절정으로 다다른다. 불쌍하게 죽은, 왜 죽었는지는 독자들만이 아는 그걸 이리미아시가 양념으로 잘 버무리니, 그간 잊었던 구원이 눈앞에 이른 것 같은 착각.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공산당을 위해 일하는 정보원이란 걸, 그들을 따라나섰던 이들이 나중에 결국 누군가를 감시해서 그걸 팔아야 자기들이 살아간다는 걸. 어쩌면 머지않아 그들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 처럼 누군가를 사기 쳐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건 운명인지도 모른다. 공산당에 부역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어느덧 사상을 의심받게 되면서, 다시 공산당에 빌붙기 위해 누군가를 팔기 시작했다는 그 자체만을 작가 라슬로는 보여주고 싶었을까?
소설에서 백미는 공산당 서기들이 나눈 대화라고 생각한다.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팔아넘긴 감시 보고서를 판독하는 그들 말이다. 집단농장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믿는 이리미아시가 자기들을 정말 보고서에서 형편없이 묘사하는 대사들은 누구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우리도 그렇게 산다는 것과 맞물리면 그걸 연민이라 부르는 것조차 씁쓸하다. 오직 인간만이 이렇게 해서라도 살아남는 최초이자 마지막 포유류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남들을 감시하고 폄하하는 보고서를 읽고 다시 정서를 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직업인 그런 서기들의 삶도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럼에도 한때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남았다는. 그들도 살기 위해 그런 거지만, 그들이 나누는 그저 평범한 대화를 읽다 보면 정말 섬뜩해진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인 그들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나누는 평범한 대화.
'힘든 하루였어, 여보?' "별건 없었어. 맨날 그렇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