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2020).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우둔한 것이 아니라 아둔한 것으로 하고 싶다. 그래야 덜 민망하니까.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생각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것이다. 제목이 뭘 말하는지도 모르고. 작가가 정세랑 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가 쓴 책은 이전에 이미 《피프티 피플》과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었다고 기억을 하긴 했는데, 작가가 페미니스트란 건 크게 고려하지 않았었다.
읽었으니 읽은 걸 되새김질을 하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란 걸 밝히는 작가가 어떻게 소설 안에서 그걸 드러내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그럼 우둔한 건가? 상대가 난 이런 사람이야 하는 건, 작가가 그걸 주장하는 건 독자에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뭐? 소설이 재미있으면 됐지. 딱 여기까지다. 독자니까. "기가 센 여자들이 아니라 기세 좋은 여자들"이라고 서평에서 그랬는데, 기가 세건 기세가 좋건 또한 그런 걸 괘념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다, 고 말할 수 없지만. 당연히 남자니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남성 우월주의자(male chauvinist)도, 거창하게 안티 페미니스트나 가부장주의자(patriarchalist) 혹은 여성 혐오자(misogynist)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대한민국에 차고 넘치는 평범한 남자 독자 중 한 명이니까.
소설 제목이 《시선으로부터, 》 라니 정말 할 말이 많았나 보다. 할머니 심시선으로부터 나온 자식들이 주인공들이다. 딱히 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이 골고루 지면을 채운다. 이러기 쉽지 않은데, 이러니 《피프티 피플》을 쓸 수 있었겠지! 여기엔 총 17명이 나온다. 소설에선 역시나 할머니 심시선이 매번 앞에 나온다. 그럼 그녀가 주인공인가? 그것도 31번. 소설을 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굳이 따지면 총 31번의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걸 장이라고 표현해도 되고, 그냥 숫자로 표현해도 되고. 이런 방식은 틀림없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기 좋은 구성 방식이다. 당연히 읽는 독자도 가독성이 좋다.
그럼 작가는 할머니 시선으로부터 뭘 어떻게 벗어나려는 걸까? 아니 할머니 시선으로부터 뭘 얻어내려는 걸까?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살다 남자로 죽을 테니, 여자들이 말하는 그 '시선'을 조금이나마 알고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웃으게 소리로 말하면 가부장제(patriarchy)가 아닌, 모권제(matriarchy)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왔어도 누군가는, 그 누군가는 틀림없이 남자일 확률이 높지만, 다른 어떤 집단에서라도 곡소리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던가? 그러니 성은 평등하다가 정답이겠지만. 아니, 성은 평등해야 한다가 더 적합한 것도 같다.
할머니 제사를 지내는 내용이다. 특이한 건 장소가 하와이라는 것. 이것 또한 특별히 특이할 것도 없을 것 같긴 한데, 왜냐하면 하와이에 정착했다면 그랬겠지만, 한국에서 죽은 할머니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니 특별하다고 해야 할까? 이건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면, 장례식이라면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휴가나 여행 비슷하게 하와이를 가려고 하지 않을까? 별날 것 없는 후손들이지만, 할머니만큼은 별난 사람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두 번이나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도 지적한 것처럼, 작가는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자기 문학적 계보를 찾지 않으니, 그러니 페미니스트겠지만, 선각자로 알려진 김명순(최초 여성 근대 소설가)이나 나혜석에서 찾으니 당연할 것 같다.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엄마 형제들이 북미와 중남미에 거주하기에 하와이란 지명이 도출된 건 작가도 지적했지만,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이런 허구를 끝까지 밀고 나간 작가 역량과 나름 재미 때문에 소설을 끝까지 읽게 된 것인데, 등장인물 중에서 굳이 지수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건 작가가 그 인물에 가장 이입을 한 건 아닌지 착각(?)을 한 건 아닌지. 어쩜, 지수가 가장 관심을 끌게 만든 성격 때문은 아닌지. 할머니를 1세대라고 한다면, 그녀 심시선은 요제프 리와 결혼하고 홍낙환과 재혼을 함으로써 4명의 자녀를 갖게 되고, 2세대라고 불릴 네 명은 이명혜, 심명은, 이명준, 홍경아 이렇게 되는데. 이들 2세대들은 결혼을 해서 3세대 박화수, 박지수, 이우윤, 정규림, 정해림이란 자녀를 갖는다. 그럼 작가는 자연스럽게 3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각자 할머니를 상징하는 물품으로 제사를 끝냈으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러니 공항으로 모두 향했다. 그러다 작은 반전이 벌어지는데, 소설 속에서 3세대를 대표할 정도로 개방적인 지수만 귀국하지 않는 결말이 이어진다. 그건 하와이에서 아주 짧은 동안 썸을 탔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체이스를 따라 야생동물을 구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이스 직업이 다이빙 강사라는 것과 그가 하와이 사람들 중에서도 주류가 아니라고 묘사되는 것 보면, 대략 지수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게다가 그 남자 직업이 '프리'다이빙 강사 아니던가. 그 프리(free) 말이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