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리엘 바르베리(2015). 고슴도치의 우아함. 문학동네.
소설이 똑똑했다. 소설이 똑똑하다니. 이 말은 이상하지만 단순히 지적인 소설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서 하는 말이다. 처음엔 그냥 읽다가 읽으면서 자꾸 작가 뮈리엘 바르베리가 누군지 손이 갔다. 책 뒤편에 있는 작가의 약력 말이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해...... 밑천이 다 드러났다. 그건 얄팍하지 않고 얕지도 않으니, 읽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런 소설을 매력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다.
처음에 제목을 똑똑한 소설은 슬프다로 정했다가 다시 정정했다. 똑똑한 소설이란 말이 부족함이 없는 듯했지만, 주인공을 알아주는 가쿠로가 나타나 르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데 갑자기 죽으니 슬프다로 바꿨다. 똑똑한 소설이라서 흡족하게 읽었는데, 주인공 중 한 명인 르네가 죽으니 슬펐다고 말하려다 소설 전개 과정 중에 드러나는 수준이 높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제목을 바꿔야 했다. 이건 작가의 지적 역량이 높아서였다. 이걸 풀어 말하면 소설 구성뿐만 아니라 내용이 상당히 사색적이다. 르네가 죽어가면서 글을 쓰는 게 이상하지만 소설이기에 가능하니 죽어가면서 그가 쓴 내용으로 인해 마음이 짠한 건 덤이다. '나의 동백꽃들."
반려묘 레옹, 뤼시앵, 마뉘엘라, 가쿠로, 팔로마, 넵튄......
주인공 르네 미쉘은 여자다. 이름에서 드러난다. 이런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있을까 싶다. 중요한 건 그녀 직업이다. 뭐냐고? 수위 말이다. 요즘 이런 말은 경비원으로 대체된 것 같은데, 이렇게 번역하면 어감이 영 이상하다. 뭔가 체격이 늠름해야 할 것 같다. 이를 보안 요원이라고 바꿀까? 그가 첨단의 이미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은행과 우체국에 근무하는 청원경찰이라고 하기엔. 그럼 아파트 관리인? 그러기엔 그녀 신분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수위로 하자. 책을 번역할 당시 2015년과 책을 읽은 2026년이란 간극이 크긴 크다. 파리에 있는 그르넬 가 7번지가 부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직장은 서울 청담동과 한남동 고급빌라 중 단독 건물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소설 제목이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다. 우아한 고슴도치?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고슴도치가 종류를 불문하더라도 우아하게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굳이 작가가 고슴도치가 우아하다고 말한 건 당연하게도 겉에 박힌 단단한 가시가 아닌 그 안에 자리 잡은 속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살고 있는 그 누군가를 나타내기 적합한 단어라서 선택했겠지? 직업이나 나이, 인종이나 국가를 넘어서 서로 친구가 되어 사는 우아한 고슴도치들을 단순히 소외된 사람들, 아웃 사이더들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하다니. 이런 은유는 매력적이다.
크게 보면 소설 속 주연은 르네와 팔로마가 될 것 같고, 조연은 마뉘엘라와 가쿠로가 될 텐데 그래도 중심은 르네라서 한 명만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당연히 그녀 르네가 될 것이다. 게다가 죽는 주인공이라니. 팔로마는 죽으려고 마음을 먹었던, 그런데 정작 그녀는 죽은 르네로 인해 살아가기로 작정한 것 같아 마음이 르네만큼 다가가지 않는다. 오히려 팔로마로 인해 르네의 죽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하나 더, 팔로마가 아래와 같은 말을 혼자 남길 때 배경음악은 '에릭 사티'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르네. 난 자살하지 않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불 지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이제부터는 '다시는' 속에서 '늘'을 찾을 거니까.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니까."
팔로마가 자신의 나이 열세 번째 되는 생일날 그는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영민하고 조숙한 천재소녀 팔로마가 바라본 어른들 세상이란 위선과 허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건 프랑스 최고 지식인 중 한 명일 작가가 바라보는 프랑스 사회의 단면인 것 같다. 프랑스 사회가 이런 지 난들 알겠는가, 이를 우리 사회에 대입해도 뭔가 비슷한 것 같다. 사는 게 다 비슷하니까. 죽음으로써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보다 사는 것이 살아야만 아름다운 세계를 알게 된다는 건 어딘가 작위스럽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살아야 그나마 기성 질서라도 바라보지 않던가. 죽으면 말짱 꽝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건 죽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그렇듯이 파리 상류층들도 주로 모여사나 보다. 유유상종? 그런 그곳은 작가가 보기에 허세 가득한 위선적인 공간이기에 무너뜨려야 한다고 팔로마를 등장시킨 건 아닐까? 소설은 "마르크스가 제 세계관을 완전히 바꿔놨어요"라고 시작하는데, 이렇게 말한 이는 팔리에르 씨네 아들이다. 그 집은 옛 산업 왕조의 부유한 상속자로 이곳 대 부르주아지 여덟 가구 중 한 가구로 아주 호화스럽고 으리으리한 이곳에 산다. 그런 그가 마르크스를 들먹이다니. 그럼 나는 뭐라고 답했을까? "독일 이데올로기를 꼭 읽어봐요." 그가 나를 몰라본거야 당연했지만,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 스물일곱 살 때부터 수위로 일하면서, 과부에다, 작고 못생기고 뚱뚱한 데다 발에 티눈이 많고 아침부터 매머드급 하품을 내뿝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았고, 늘 가난했고, 남 앞에 잘 나서지도 않으니 누구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살아왔기에 하는 말이다.
이곳에 변화의 바람은 일본인 가쿠로가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부촌 아파트에 이사 오는 일본인이라니. 주류 거주민들과 동급일 정도일 정도라면 가쿠로가 지닌 물적 토대 또한 만만하지 않을 텐데, 작가가 굳이 가쿠로를 등장시킨 건 누구 못지않게 박식하고 재산이 많은 그를 소박한 인물로 그려 기존 부르주아지들과 대립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것도 같은 프랑스인이 아니라 외부인을 등장시킴으로써 말이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 가식적이지도 않은 그가 고슴도치 르네가 지닌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는 건 상징적이다. 외국인이기에 가능할 것도 같은데. 이건 작가가 당연히 일부러 의도한 것이지만, 더해 자살할 정도로 예민하고 섬세한 팔로마 또한 르네가 지닌 품격을 알아봤으니. 비록 수위라도 말이다.
이제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 사색 거리를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작가가 지닌 지적 역량을 같이 음미해 보자. 이미 르네는 세상을 떠났고 다행히 팔로마는 자살로 생을 마치지 않기로 했으니, 걱정할 것이 없지 않던가. 이럼으로써 넷플릭스 영상에 잠시 잠식된 '생각'이란 걸 해보자.
욕망하느라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들은 필요한 것에만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시건방진 욕망이 없는 세계에서 비로소 싸움과 억압과 백해무익한 위계질서를 말끔히 씻어낸 새로운 사회조직이 생겨날 것이다(p. 16).
정신의 심오한 사고가 아니라 물질의 걸작, 실재적이고 만질 수 있는 어떤 것, 아름답고 미학적인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인간의 삶을 살찌우는 사랑, 우정, 예술의 아름다움 같은 것, 나는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랑, 우정 이런 것을 정말 안다고 하기에 난 아직 너무 어리다. 하지만 만일 내가 살아 있게 된다면, 예술은 그야말로 내 삶의 전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예술은 거장들의 걸작이 아니다. 아무리 페르메이르(바로크 시대 화가?)라 해도 목숨을 걸 정도로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숭고하지만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아름다움이란, 생의 운동 속에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 46).
인간은 행동으로써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써 힘을 갖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언어로 지배하는 것이 궁극의 능력인 세상에 살고 있다...... 사실 우린 먹고, 자고, 새끼를 낳고, 영역을 차지하고, 그 안전을 도모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영장류다...... 사실 그 말 잘하는 이들은 자기 밭을 지킬 능력도 안 되고, 저녁식사 때 토끼 한 마리 잡아오지 못하고, 제대로 생식할 능력도 없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없는 자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는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있어 아주 끔찍한 상처이며, 일종의 타락이자 깊은 모순이다(p.75).
인간의 탐욕!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위대하게 하고 우리를 죽이기도 한다. 욕망! 욕망은 우리를 짊어지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다...... 욕망 때문에 우리는 설령 내일 죽게 되더라도 한 줌 먼지가 될 제국을 건설한다. 이것은 마치 다가올 제국의 전락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제국을 건설하고 싶은 갈증을 억누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계속 갖고 싶도록 영감을 고취시키는 것과 같다...... 곧 우리는 찾지 않아도 되는 쾌락을 열망하며, 시작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 행복한 상태를 꿈꾼다. 아름다움이 더 이상 목적도 계획도 아닌, 그러나 필시 우리 본성 자체가 될 상태. 그래, 이런 상태, 이것이 예술이다(p. 284).
모든 영장류가 최우선으로 전념하는 것이 섹스, 영토, 그리고 서열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의 의미에 대한 성찰은 상대적으로 무의미해 보인다. 물론 그들은 인간은 단순한 충동 그 이상의 것을, 더 의미 있는 것을 열망한다고 논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이 더없는 진실인 동시에 (그렇지 않으면 왜 문학을 하겠는가?) 더없는 거짓이라고 반박하고 싶다. 의미 있는 것, 그것 역시 충동이다. 가장 높은 층위의 충동이다. 그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유능한 수단인 이해를 활용하여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에 도달하는 것이다(p. 347).
나는 두 가지 확실한 점을 파악했다. 계급에 비례한 쾌락과 고통 속에서 강한 자는 살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것을. 리제트(르네 미쉘의 언니)가 예쁘고 가난했던 것처럼 나는 영리하고 초라했기 때문에, 내 계급에 대한 경멸로 머리 좋은 내 장점을 살리고자 한다면 그런 비슷한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결국 나는 살아왔던 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길은 비밀의 길,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늘 그래온 것처럼 입을 다물어야 했고, 나와 다른 세계에 나를 섞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입 다문 자, 따라서 나는 숨어 사는 자가 되었다(p.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