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워튼(2009)이 쓴 《여름》처럼 여기도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는 단편이 있다. 「그 여름」. 대략 결말이 어떨지 그림이 그려진다. 아니면 말고? 농담처럼 시작하는 이유는 '여름'하면 단어 여름이 주는 또 다른 의미와는 다르게 결코 열리지 않는 열매 같다. 그래서 시간처럼 어떤 여름이건 여름은 지나간다. 그래서 어떤 열매라도 맺으면 그나마 좋으련만. 이 작가는 이미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으니, 기우인 것은 확실하다.
소설에서 열매의 의미가 아닌, 시간의 의미로 여름을 쓰면 대게 지나갔음을 의미한다. 지금 보면 말이다. 이 소설의 띠지에 쓰여 있는 말처럼 "미숙했던 지난날"이 많이 쓰이는 여름의 뜻이다. 그것도 소설가가 여름이란 단어를 쓰면 아쉬움, 미련, 미성숙 이렇게 연결되는 것 같다. 마저 띠지를 읽어보면 "지난날의 작은 모서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처럼 이 소설이 그렇게 쓰였다. 이 소설의 전작 쇼코의 미소(2016)도 그랬다.
그래서, 이 작가는 이렇게 소설을 쓰는구나. 참으로 섬세하고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던져줘서 잘 쓴 소설 같은데, 영 뒤끝이 편하지는 않았다. 이 소설을 읽은 내가 누군지 모를 테고, 어느 한 독자가 느낀 감정이 작가에게 전달되지도 않을뿐더러, 이 작가는 이미 이렇게 쓰는 소설로 정평이 나있다. 보통 말하는 결이 다른 작가이니, 다음에 기회 되면 안 읽으면 그만이다. 그게, 독자가 선택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렇다고 작가를 비판하냐고? 비판은커녕 비평도 아니다. 그저, 이 작가는 작가로서, 그렇게 갈망하는 소설을 본인이 원하는 만큼 쓸 것이고 또 계속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는 정도.
사실, 이 소설이 독자인 내게 감동적이었냐고 물으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작가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을 테고, 더불어 성별도 여성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 보면 지난날 아득함 들을 소환시켜줌에 감사를 하면서도, 여성들의 감성이란 게 이렇게 세밀할 수 있구나 알려줘서 고맙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가 젊으면 내용도 젊어지는 걸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떤 소설은 내용에 빠져서 작가의 연령을 생각할 필요도 없지만, 이 소설은 아니었다. 그래서 작가도 연륜이 필요한가?
소설 내용은 주로 10~20대 여성이기에 그려지는 묘사들. 아주 친했지만 미숙했기에 오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으니, 젊은 날인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젊다가 미숙하다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가가 다루는 내용들이 대게 그렇다. 이 작가가 이렇게 관계를, 어떤 관계건 세밀하게 그 내용을 조각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섬세 그 자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면 중언부언이다. 이게 작가의 능력이다.
그래서, 이 책이 내게 '무해'했다고 말하면 확실하긴 한데, 그럼 책을 읽고 소회를 읊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이 많아서? 좋은 책을 선별할 능력 이전에, 독자에 따라 좋아하는 책이 달라지듯이, 너무도 이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는 작가가 젊기에 내용들이 그렇게 서술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래서 언젠가 연륜이란 단어가 작가에게 드리워질 때 과연 이 작가가 그 변화를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해진다. 어떻게 시간이란 불가피함을 문장 속에서 어떻게 표현해낼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작가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게 이 글을 쓰는 이유이면서, 어쩌면 이 작가의 이 책이 이 작가에게 길게 보면 '여름'에 해당되는 시기가 아닐까 한다. 그건 어차피 독자 생각이지만.
「고백」을 읽으면 나오는,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래서 든 생각. 작가도 살아오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우리가 살면서 맺는 그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는 사실로 인해 '무해'함에 천착을 하는데, 한편에서는 소극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도, 앞으로 나이가 더 들면서, 그녀가 그리는 무해한 상황들을 어떻게 소설 속에서 그려나갈지 정말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