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기원

[책 여행] 정유정(2016). 종의 기원. 은행나무.

by 길문

역시, 정유정이다. 이 작가를 좋아하건 아니건 그녀가 쓴 소설을 읽게 되면 재미있다. 소설의 흡입력이 세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런 능력이 타고난 걸까? 길러진 걸까? 그녀가 쓴 소설은, 아니 그가 쓴 소설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 경계를 허문 작가 정유정. 그런 정유정을 이제야 알고 그가 쓴 소설을 요즘 읽는 당신은 누구세요? 소설가 지망생? 아님, 한량?


도대체 소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뭘까? 그것도 좋은 소설이. 소설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 그래서 작가의 촉이 중요한데, 이게 길러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공부도 학자 중에서 유난히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 애초 머리가 좋은 데다 성실하기까지 하고, 거기에 학자로서 감각이 좋다면 금상첨화인데,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곳은 아카데미아(academia)이다. 그곳은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생산물들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어렵다. 그때 만들어낸 지적 생산물은 애초 용도가 다르다.


나름 그곳에서도 지식이 정밀하게 만들어지지만 그건 주로 먹고사는 것과 연관이 깊다. 예를 들어 법학, 경영학, 회계학, 공학 등 학자가 들어가서 마치 고매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이를 영어(law, business admistration, engineering, accounting, etc.)로 표현하면 어감이 확 달라진다. 한자문화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고, 여전한 사(선비士)를 우대하는 풍토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것은 어느 정도 제도권에서 보증하는 증명서(certificate)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증명서가 변별력이 없다는, 아카데미아(academia)를 나오면 용도가 쉽게 폐기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직업이 아닌, 직장을 구하는데 아직까지 유효한 연장으로 쓰이긴 하지만 말이다.


세상이 바뀌는지, 최근 나온 책들을 보면 작가 소개란에 옛날처럼 출신 대학을 잘 표기하지 않는 것 같다. 졸업장이 작가의 품질을 증명하는 증명서도 아니기에, 소설가는 그가 쓴 소설로 평가받지 않던가. 아직도, 좋은 대학 나와야 좋은 소설 쓴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은 이마에 졸업장을 붙이고 다니겠지만, 창작의 울타리는 졸업장으로 만들어질 수 없기에, 더 정확히 누군가 자기가 만들어낸 표현으로 공감을 이끌어 낼 정도의 사람은 그런 소도구가 필요 없기 때문일 것 같다. 오히려, 귀납적으로 분별하지 않던가. 결과적으로 말이다. 가방끈이 기니, 글도 잘 쓴다는. 아니면, 다다익선.


그럼 소설가는 어떻게 태어나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그래도 생각해 봄직한 질문을 하게 된 계기는 정유정이 쓴 <종의 기원>이란 소설 때문이다. "악이 어떻게 존재하고 발화하는지"를 치밀하게 묘사한 책. 대체적으로 사이코패스가 악으로 그려지고, 그들 사이코패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악이 발현되는 과정을 뛰어난 문장력으로 그렸다는 거야 새삼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악이 유전적으로 탄생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건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란 제목이 주는 엄청난 영향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악마의 기원이거나 악의 기원을 다룬 것이기보다 악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다룬 소설이란 세간의 평가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품행장애 중에서 유전적으로 그런 기질을 물려받는 사람을 일컫는 전문용어가 이제는 반사회적이거나 비도덕적이고, 냉정하거나 잔인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로 '진화'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연쇄적으로 죽이거나 하지 않음을 볼 때, 그래서 특정 인간에 내재되어 있던 악이 외부 자극에 의해 점화되는 점을 강력한 진공청소기처럼 성공적으로 묘사하는 이 작가는 어디서 탄생했는가?


누구나 소설가가 되길 꿈꾸지 않는 것처럼, 설령 소설가가 되기도 쉽지 않지만, 여기에 소설가가 된다고 생계가 유지되는 것도 쉽지 않음은 너무도 자명해졌다. 그래도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융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영상 시대에도 꾸준히 존재하는 것은, 그 소설가란 명명이 주는 자아 효능감이 엄청 높기 때문인 듯하다. 자기가 쓴 문장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에 대한 비교우위와 그렇게 되고 싶은 동기가 강렬하게 버무려진, 이런 욕구와 동기가 소설을 읽는 독자 시장에서 선택되어 우위를 점함으로써 소설가가 탄생되는 것은 아닐는지.


다른 사람보다 소설가로서의 뛰어난 유전인자가 다음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사이코패스 중 일부가 살인 등을 저지르는 것처럼, 좋은 문장을 창조함으로써 작가가 자기가 사는 시대와 그 시대에서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공감하려는 작가의 피나는 노력이 어느 정도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작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그것도 자연선택처럼 일부만 독자 시장에서 선택되는 것임을 확실히 알 것 같다.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소설을 왜 써야 하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서 이겨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지망생)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한 사람들이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전 04화어! 내 이름이 빠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