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독특해서 라벨이 쓴 피아노 곡과 나중에 편곡한 오케스트라 곡도 들어 보았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지만 좋았다. 그래서, 파반느(파반)가 뭔가 했더니 이탈리아에서 16세기 초에 시작된 분위기가 장중하고 위엄 있는 궁정 무곡이다.
모리스 라벨이 만든 이 곡은 17세기 회화의 거장 스페인의 디에고 벨라스카스가 그린 그림 '시녀들'(라스 메니나스) 혹은 <펠리페 4세 일가>가 주요 모티브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라벨의 곡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그도 벨라스카스의 그림을 뚫어지게 보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다 아는 얘기.
벨라스카스는 나중에 펠리페 4세의 궁중 화가로 활동을 하면서 이 작품을 남긴 것인데, 이 그림에 등장하는 시녀의 모습이 자못 인상적이다.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더 보면, 궁중에 있는 벨라스카스의 화실에 어린 마르카리타 공주를 시중드는 시녀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는 펠리페 4세 부부의 모습이 거울 속에 묘사되고, 그 스스로 그림의 화가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오른편에 서있는 시녀. 못생긴 '그녀'가 주인공인 것 같다. 그런 그녀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돌아왔나 보다. 박민규의 소설 속으로 말이다.
모리스 라벨은 벨라스카스의 [시녀들]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 파반느라는 무곡을 작곡하고, 소설가 박민규도 벨라스카스의 그림을 보고 못생긴 여성을 주제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림을 보면 마르카리타 공주가 시녀보다 훨씬 예쁘게 그려진다.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왕가를 도와주는 시녀들이 공주보다 더 예쁘게 그리면 뭔가 궁중 화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렸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때나 이때나 시녀들이 못생겨야 왕가들이 만족했을까? 공주가 시녀들을 질투하면 안 되기에?
드뷔시에 버금가는 프랑스 현대음악의 거장이라는 라벨과 그의 원곡 제목이 당연히 소설보다 더 유명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문장의 전개가 음악보다 매끄럽고 아름다웠다면 좀 뻥 같을까? 음악과 소설을 비교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만, 소설 문장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여기에, 못생긴 여자가 주는 이미지라는 것을 소설로 다룬 박민규도 대단하다는 것을 떠나, 벨라스카스가 그 작품을 그릴 때 설령 시녀가 못생겼다는 것을 넘어서 못생기게 그린 어떤 의도가 없었나, 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소설가 박민규가 표절로 인해 평가절하되는 거야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지만, 이 소설 어디에도 박민규가 소설가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조그만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라벨은 그의 곡에서 죽은 왕녀를 특정하지 않은 채 그랬음직한 영감으로 그 곡을 작곡하지만, 박민규는 그의 소설 속에서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는 통념에 상처받은 인간을 라벨 곡보다 더 애잔하게 그려낸다. 이 소설에 동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아픔을 마음속에 쟁여놓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던가. 소설은 그 어쩔 수 없음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
그래서 왕녀가 죽었는지 아닌지 상관없이, 왕녀로 상징되는 그 무엇과 그 무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어둔 채, 생각해 보면 우리 대부분이 그 주변인들, 왕족이 아니라 시녀(혹은 시종) 아니던가. 못생긴 남자 시종도 당연히 있었을 것 같기에 말이다. 이때, '못'생긴 이 상징하는 게 여성과 남성에 대비하면 확연히 달라지지만, 못생긴 남자도 여기에 경제력까지 없다면,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외모 콤플렉스가 단순히 현대가 만들어낸 병폐만은 아닐 것도 같았다. 그렇겠지!
잘생긴 아버지와 별로 생긴 엄마를 주인공으로 태어난, 여기에 태생적으로 배다른 아들로 태어난 요한에, 더불어 소설의 핵심 주제인 못생긴 여자까지, 결코 어떤 시대든 중심인물이 될 수 없는 주변인들에게 벌어졌던 아스라한 지난날의 소환. 화려한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에서 일하는 젊은 청춘들의 연가,라고 하기엔 미약해서 그저 상처투성인 우리네 인생을 그래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따듯한 동감과 위로가 차라리 좋겠다.
소설 속에서 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많지만, 그래야 소설가가 하고픈 말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느 날 소설가로 성공한 주인공이 그녀를 찾아 독일로 찾아가는 그 심정이 그려지는데, 그 소설가는 죽은 주인공이고, 진짜 소설을 쓴 주인공은 요한이란 설정을 보면, 그래서 라벨이 주는 곡보다 소설이 더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음악으로 이런 전개를 표현할 수 있을까? 귀로 듣고 뇌가 이해하는 거나 눈으로 보고 뇌가 해석하는 거나 과정은 같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주는 공감 영역이 때로는 음악이 주는 감동을 넘어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더불어, 작가의 컷(writer's cut)을 넣음으로써 독자에게 열린 결말을 이끈 것이라고 보다, 이로 인해 이 소설이 결말은 슬프지 않지만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지는 장치인 것 같아, 이 소설에 더 빠지게 하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적어도 지금 글 쓰는 이에게는 말이다. 그런데, 작가가 어디서 했다는 말인 '우리 인생에서 자기 내면의 빛을 자신 있게 드러내야 사랑도 세상도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말'은 아직 글쎄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떠나서, 우린 어쩌면 '그냥'사는 것 인지도 모른다. 우린, 아니 나는 라벨도 아니고 박민규도 아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