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여행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의 기본적인 역할은 지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구축하는데 그 유명한 중국의 만리장성도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이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것들을 진나라 시대에 연결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뭐 중국까지 그것도 중국 최대의 건축물을 비교할 필요도 없지만 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들었을 뿐. 부산의 금정산성, 서울의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고창의 읍성, 순천의 낙안읍성 등 우리 주변에도 성이 많다.
그런데 요즘 성의 용도는 아주 달라졌다. 독일의 그 유명한 노인슈반슈타인성도 중세 유럽의 성처럼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니. 오로지 바그너에 빠진 루트비히 2세가 취미로 지었다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성도 '소비'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주 바람직하지 않던가. 그런데 결정적으로 성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은 중국의 만리장성도, 우리의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도 아니었다. 지나면서 점심이나 먹으러 들렀던 고창 읍성이었다.
성이라 그것도 평지에. 전라도 지역에서 출몰하던 왜적을 막으려 만든 성. 애초 성으로 인해 생과 사가 갈리기도 했을 텐데, 혹은 성으로 인해 성안에 사는 사람들과 밖에 사는 사람들의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부르주아 bourgeois의 원 뜻도 중세에 성안에 둘러싸인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다. 성으로 인해 신분까지 달라졌던 시대가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시대를 넘어 성 자체가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도 잘못된 건가? 문화적 수요가 있으니 소비가 되고. 그렇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역사라는 부스러기. 부스러기가 역사라니. 그렇게라도 지난 시간, 그 흔적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정말 훌륭하지 않던가. 오늘을 살기 위해 어제가 필요했듯이. 그것을 기록한 게 역사이거늘. 그게 성을 찾는 재미일 것이다.
▶ 부소산성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중·고등학생 시절 배운 역사는 이긴 자의 역사였던듯싶다. 나당 연합군으로 인해 통일된 삼국시대. 국토의 크기나 대륙으로 진출 등을 고려하면 당연히 고구려야 했다. 신라는 외세와 결탁했다는 오명을 오늘날까지 받는 것 같고. 그런 와중에 백제는 안중에도 없다. 한때,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는데, 역사라고 별 수 있겠는가. 기록하는, 승자의 역사이거늘. 그렇다고 패자에 대해 연민까지 가질 필요는 없겠다. 오히려 앞으로가 더 중요할 텐데 나라의 크기가 작아도 잘 사는 나라는 많다.
다시 성 얘기로 돌아오면 여전히 무지하다. 남한산성, 북한산성, 행주산성, 공주 산성 정도. 여기에 고창 읍성 하나 추가. 나머진? 그중에 하나 부소산성. 부여에 있는 부소산성은 언젠가 와보기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이라곤 백자 의자왕과 삼천궁녀 설화. 믿거나 말거나 가서 직접 본 소감은 여기서 어떻게 백마강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정도의 회의. 그 이상 없었다. 부여 건 백제건. 그나마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 해서 관심을 끌게 된 것이 나한테만 해당될까?
이제는 관북리 유적이 부소산성과 동급이다. 미천한 지식이지만 과거 이곳에 왔을 때 관북리 유적이란 말은 그리 강조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바뀐 것이다. 부여의 수도 사비성으로 한정하더라도 당연히 왕궁이 분명히 있었을 테고 그런 추측의 일환으로 발굴해나간 것이 관북리 유적이다.
난감했다. 도대체 어디가 성인지. 지도를 보니 대략 감은 잡히지만. 문화해설사한테 물어보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 모든 성을 돌로 만들지 않으니. 같은 백제시대에 건축된 공주 산성도 원래는 토성이었다. 토성. 그렇지 그 토성. 그 위에 조선시대에 석축을 한 것이다. 부소산은 산인데 높이가 무려(?) 106m이다. 그래서 산이라기 보다 평지에 솟아있는 잔구(殘丘)에 가까운데. 이곳 부소산을 다시 오기로 결정한 결정적 배경은 관북리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참. 누군가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다시 가보지. 그런데 가보니 역시나 달라 보였다. 예전엔 그냥 부소산성, 그게 산인지 산성인지도 몰랐는데 그곳이 예전에 위급 시 피난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후대의 추측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관북리 유적은 어디 있고 뭘 말하는지. 부소산성 입구 매표소를 지나 안쪽으로 산성 올라가기 왼편에 표지판이 전부였다.
이 땐 이게 전부인 줄 알았다. 아무튼 오늘 주인공은 산성인지라 눈을 부릅뜨고 산성의 증거(?)을 찾으러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났는데 그게 바로 공사 표지판이었다. 해설사분의 친절한 설명도 한목 했지만 복원 공사가 뭐 때문에 이뤄지나 봤더니 그게 산성 때문이다. 가림막으로 가려진.
부소산성은 현재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 형태라고 하는데 최근 조사 결과로는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축성이고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이라고 한다. 일부 테뫼식 산성은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뭐가 테뫼식인지 포곡식인지 몰랐는데 테뫼식은 산봉우리에 머리띠처럼 방벽을 둘러싼 것이고 포곡식은 성안의 계곡을 둘러싼 능선을 따라 방벽을 친 것이다.
결론은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가 성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무튼, 사비성(泗沘城)이라 불리기도 한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성안에서 수혈식 주거지와 도로 유적, 배수시설 등이 발굴되었다.
▶ 나성(羅城)
어라. 한자가 같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1978년 새샘 트리오가 부른 그 노래에 나오는 가사 나성을 한자로 바꾸면 나성(羅城)이다. 이때 나성이 미국 LA를 말하는 음역어(한자를 이용해 외국어의 음을 표현)인데 나성이라니. 그냥 외성 하면 쉬웠을 텐데. 그래서 성곽의 종류를 찾아봤더니 아, 이것도 복잡하다. 그냥 쉽게 나성은 성의 외곽이나 성 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을 말하는 것이다.
나성이 중국 당나라 때 정립된 제도라는데 그러고 보니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하지 않았던가. 좀 더 나가면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제도를 따랐고, 수도를 자주 옮겨야 해서. 신라는 경주에서 옮긴 적이 없으니 성에 대한 이중 체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냥 나성보다 외성(外城)이 쉬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다. 대략 평지에 성을 쌓아 궁궐을 짓고 근처 산지에 산성을 쌓아 방어를 하는 이중 체제 정도로 이해해야겠다.
예전에 부소산성에 왔을 때 관북리 유적을 몰랐던 것처럼 능산리 고분은 교과서에서 배웠는데 나성까지 배웠는지 잘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왔을 텐데 다 까먹었거나 모범생이 아니었으니 기억에 없다. 그래서 나성이 어디 가봤더니 능산리 고분 외편에 건설되어 있었다. 대략 이해가 된다. 부소산 밑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왕궁터로 짐작해보건대 전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이 필요했겠지. 둘레가 약 8.4km로 당시 백제의 수도인 사비를 둘러싸고 있는 외성이고 사방에 문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최초로 축조된 나성은 수도의 외곽 방어시설로 주로 도시의 북쪽과 동쪽을 둘러싸고 있고, 부여의 서쪽과 남쪽은 금강이 자연스럽게 방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나성이 훗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개경의 나성과 한양도성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부여의 방어 체계는 가림성, 청마산성, 석성 산성, 증산성 등의 산성을 통해 수도 동서남북을 방어하는 체계를 만들고 그 안으로 나성을 구축해서, 마지막 3차 방어선인 부소산성을 기반으로 수도를 방어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직접 와보면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보다 시각적으로 시원해서 좋다. 뭔가 뻥 뚫린 듯한 이 시원한 느낌은 사실 능산리 절터가 말 그대로 절터여서 그런 것 같다. 원래 있어야 할 절이 없고 터만 남았으니 당연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절터 크기가 엄청나다. 이렇게 큰 절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오른 편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과 연결되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성 밖에 왕과 왕족 등을 위한 고분군이라. 그럼 그 절은 그 고분군 사람들을 위한 제사를 담당했을 테고. 그래서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나왔을 것인데, 목탑지 하부에서 능산리 사지 석조 사리감(국보 288호)을 찾아내서 이로 인해 사비시대 왕실 무덤이라고 확신한다고 한다.
그런데 7기인 대부분의 묘소가 도굴된 것으로 알려지지만 도굴된 내용도 중요할 수 있지만 이 무덤이 횡혈식석실묘라는 내용보다 그저 이곳이 참으로 평온하게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본능적인데 왕실무덤과 절이 그냥 자리 잡았겠는가. 이곳이 풍수적으로 엄청 좋은 곳이라는 것만 언급한다. 그저 한 번 가보시게. 그래서 그런 느낌 받으면 나랑 동급일세. 그래서 뭐? 그냥 그곳이 좋다고. 시각적으로나 느낌으로도.
▶ 가림성 혹은 성흥산성
부소산성이야 원래 유명한 관광지였으니 사람이 제일 많은 것이야 당연하고, 나성은 글쎄 가족 나들이 온 몇 명 정도. 아마 이것도 나같이 유네스코 어쩌고 해서 온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능산리 고분군이 그저 무덤 아니던가. 그것도 당시 최상류 계층의 무덤. 어쩌면 이로 인해 역사적 가치가 더해지고 더 보존할 가지가 된다는 것이 한편으론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당시 삼국시대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주인이 아니었잖은가. 그런데 아, 가림성은 달랐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이 성흥산성이야말로 제대로 '소비'되고 있었다. 이 산에 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추측건대 사랑나무 때문이지만. 여기서 인생 샷 하나 건지려고 혹은 연인과 가족과 사진 찍으러 오는 곳으로 변모했지만 사람들이 찾게 되니 성에 대한 조사와 복원이 이뤄지니 이런 게 선순환인 것 같다.
이 산성의 둘레가 600m라는데 부소산성과 비교하면 확실히 테뫼형 산성이 뭔지 쉽게 이해된다. 당시 지명이 가림군이라서 가림성으로 불리고 501년 동성왕 때 ) 8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봐서 백제시대 축조된 성곽 가운데 연대가 확실한 유일한 것이고 이곳의 지명을 알 수 있다. 성안에 남남·서·북문지와 군창지, 우물 터 세 군데 및 토축 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다는데 이를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웠다. 성을 복원하는 중이라 공사 장비와 시설로 인해 어수선했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랑나무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순서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현재 성흥산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뒤 산이 성흥산이다. 이 단순함. 부소산에 부소산성. 북한산에 북한산성. 그런데 성흥산도 높이가 260m이다. 이 정도면 부여가 얼마나 평지에 건설된 곳인지 쉽게 이해된다. 가림성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나온다던데 뭐, 삼국사기를 읽을 기회가 없으니.
역시, 이 산성의 주인공은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산성이 주인공이 아니다. 근래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게 명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생 샷 남기러 오는 거지만 나무 왼편 가림성 표지와 석축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런데 뭐 어떠랴. 이제 성은 지키는 성이 아니어도 되거늘.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금은 지키지 않아도 되니 실컷 즐기다 가면 좋을 것이다. 이 나무는 밑에서 오를 때 보이는 그 모습이 더 백미다.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느티나무를 심을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위치 자체가 기막히다. 그래서 일출과 일몰 명소가 된 것은 아닌지.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곳이 뜨게 된 계기가 드라마 때문이다. '서동요'와 '호텔 델루나'가 여기서 촬영을 했다는데 명소가 되는 루트가 이젠 명확해진 것 같다. TV 드라마 등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면서 여기에 인터넷 검색이나 SNS를 거치면 그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게 미디어의 힘인 것인데 이런 것이 없었다면 누가 부여 남쪽 끝 산성에 찾아오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고 생각해도 이곳은 가림성도 사랑나무도 아닌 여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강경 평야인 것 같다. 아니지, 저 멀리 군산으로 흐르는 금강인 것 같다.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보물이다. 그래서 부소산성에 가서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경치를 즐기던, 평지인 부여를 지키기 위해 나성을 만든 백제인들의 현명함을 느끼던, 심지어 백제성이 아니라도 천연기념물인 나무를 두고 사진을 남기려는 욕망이 디지털 시대에 성을 다르게 소비해도 확실한 것은 성 그 자체가 없었으면 이런 콘텐츠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성을 왜 만들었겠는가. 거기엔 그 주인공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성이 더 빛나는 것 같다. 그 성안에 그리고 이제는 성 밖에 많은 흔적을 남기거나 흔적을 찾으려 하니 말이다. 사람이 남긴 흔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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