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노란색? 레몬 맛은 쓰다.

[책 여행] 권여선(2019). 레몬. 창비

by 길문

과일 레몬을 이 소설 때문에 뭔지 찾아봤다. 그렇다고 레몬을 몰랐다고? 회를 먹을 때나, 더운 날 레모네이트을 시원하라고 먹을 때 알게 되는 과일. 그런 레몬은 비타민C와 구연산이 많아서 신맛이 강하고... 어쩌고...


우선, 신맛이 강하다는 것은 다 알 거다. 그 맛으로 레몬을 먹을 텐데, 제목이 레몬이라서 소설이 그렇게 신맛일 줄 알았다. 소설이 신맛이라니. 읽고 나서 아이셔... 하고 찡그려질까. 이 정도 고통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텐데...


소설 《레몬》은 신맛을 알려주려 쓴 게 아니었다. 미각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레몬은 시각적으로 활용된 소품 이상이었다. 이게 그냥 소품이었는지, 소설을 관통하는 어떤 상징인지 읽은 사람마다 달랐을 것 같다.


그건 소설가의 몫이 아니다. 그건 당신 몫이다. 왜 소설 《레몬》을 읽었는데? 왜? 원래 이 소설 제목이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였다고 한다. 이게 같은 제목의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그 후 약간의 수정을 통해 이 제목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럼, 작가의 의도는?


언니 해언을 잃은 동생 다언만이 주인공 같지는 않다. 주로 다언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소설은 죽은 언니를, 아니 누가 언니를 죽였는지 찾아나가는 소설인 것 같기도 한데, 주제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이 언니를 죽인 그 누군가를 찾아서 '복수'를 해나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은 확실한데, 미제 사건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누가 죽였는지 알 수도 없고. 살아남은 자는 누가 죽였는지 알아야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다언이 중심이 되는데, 구도 상 그렇다는 것이고, 누군가 그 누군가가 어떤 누군가에겐 사랑을 받는 없어선 안될 그 누군가가 지금 없는 상황. 이게 남은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작가는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누군가 죽었는데, 그 누군가를 누가 죽였는지 따라가지만 그게 명확하지 않다.


작가의 노림수가 이것 같았다. 그 노림수의 상징이 노란색? 병아리 색과 유치원생 옷이 노란색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연상되는 것도 같다. 그럼, 상실, 부재, 비통을 상징하는 색깔이 노란색? 작가는 이걸 비튼 것 같다. 상식을 말이다.


소설을 읽을 때 제목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읽었다. 글 중간에 노랑 원피스, 계란 노른자, 프리지어 등이 상징하는 색깔도 그냥 흘려보냈다. 결말이 더 궁금해서였다. 나중에 이 글을 쓰려고 보니 '왜' 제목이 노란색이지?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곱씹고 곱씹게 되었다. 노란색이라니. 그러니, 오렌지나 귤이 될 수 없다.레몬은 다르다. 명확하다. 노란색.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죽은 후 17년. 어떤 생각이 들까? 산 사람들이 느끼는 그 기간이란. 그것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동생 다언은 그사이 상처가 회복되기는커녕 상처가 상처로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의 기대로 성형수술을 해가면서 언니 해언을 닮아가지만,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누군가 봄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듯이, 나는 내 삶을 잃은 줄도 모르고 잃었다"라고.


이건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유력한 살인 용의자였던 한만우의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한만우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라고.


소설에서 진짜 범인 일 수도 있는 한만우의 삶 보다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라는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어땠을까? 엄마가 난쟁이라면. 그래서 한만우가 병으로 죽은 것보다 더 쓰게 느껴졌다. 그 가족이 느꼈을 편견이란 고통이 말이다. 한만우도 난쟁이 엄마도 허구지만 말이다.


결국 결론은 "그들은 죽었고, 나는 살아 있다"라고 맺는데, 이게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했지만,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소설이 자꾸만 '쓰게' 느껴졌다. 레몬 맛이 원래 이랬었나? 작가는 이걸 같이 느꼈으면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여기서 멈췄으면 했는데, 작가는 한걸음 더 느끼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편 가르기기 좋아서가 아니라 이건 절대 명제다. 죽음이라는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라고. 사랑하는 언니의 죽음이 종국에는 신까지 소환한다. 죽음과 삶을 말하니 신이 필요했겠지만, 쉽게 접했던 소설이 이제 그냥 소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죽은 해언이와 만우 빼고 산 다언이나 태림이나 상희나 정준이나 그들 사이는 확연해졌다는 것. 서로 넘을 수 없는 선이 거졌다는 것. 누군가 죽음으로써. 여기에, 의탁해서 위로받을 신이나, 내적 고통을 이기려 쓰고자 했던 시도 결코 해결책이 아니었던 것. 죽음은 그런 것이다. 한번 선이 거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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