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렇지. 비행운(飛行雲)의 '행'은 행운(幸運) 할 때 행이 아니다. 비(飛)는 역시 아닐 비(非)가 아니다. 비행운은 비행기가 날 때 생기는 하얀 꼬리 모양이다. 하늘 높이 나니까 그때 그곳 하늘의 기온이 당연히 낮고, 비행기 엔진에서 배출되는 배기가스는 뜨거우니 그 배기가스에 수증기가 응축돼서 발생된다. 그런데, 이 단어 비행운이 자꾸만 비행운이 아닌 비행운(非幸運)으로 읽힌다. 행운이 없다. 행운이 아니다?
이게, 작가 김애란을 관통하는 특징이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평론가가 아니라서? 이미 읽은 소설집 《바깥은 여름》(2017)과 《달려라, 아비》(2019)을 읽고 궁금해서라기 보다, 글 쓸 거리를 찾다가 찾은 책이다. 작가 김애란이니까 선뜻 손이 갔다. 그러고 보니 이 단편집이 앞에서 언급한 책들보다 먼저 발행되었다. 아는 체 하긴 그렇지만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어둡다가 밝아지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걸 주장하기는 그렇다. 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하니 작가도 변하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
《달려라, 아비》(2019)의 일부 단편은 시원했다. 비극 같은데, 희극인 것 같은. 이 책엔 8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중 대표작 제목이 비행운인 줄 알았더니, 비행운이란 단어는 단편 〈하루의 축〉에 나온다. 공항에서 청소부로 살아가는 기옥 씨 이야기에.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p. 176).
그러고 보니, 《바깥은 여름》도 실려 있는 7편의 단편 제목과 상관이 없다. 《달려라, 아비》는 몇 편의 단편이 있었더라? 《달려라, 아비》의 제목은 실린 단편과 제목이 같다. 그래서 든 궁금한 점 한 가지. 단편을 묶은 소설집 제목을 누가 정할까? 출판사일까 아닐까. 그 제목이 전체 단편들을 아우르는 주제일까 아닐까. 잘 모르겠다.
그랬다. 제목 때문에. 어릴 때 하늘 보면 생겨있던 그 비행운이 뭔지 이제 정확히 알았지만, 그때 그게 사람 사는 행적처럼 느낀 건 당연히 지금이다. 빼박이다. 그대로 행적이 나타난다. 갑자기 착잡해진다. 그럼 내 행적은? 삐뚜로? 일직선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속일 수 있지만 그게 없어질까?
같은 비행운을 보면서 작가는 역시 작가다웠다. 하늘을 날 때 생기는 비행운이 누군가에겐 무사히 이륙한 비행기를 보면서 안도할 수 있는 신호가 되다니. 무사히 비행기가 이륙하면 당연히 다행이지만, 그래서 행은 행운 할 때 행이다. 잠시 딴생각. 하늘에 새겨진, 그것도 아주 높은 하늘에 보이는 비행운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비행운을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라고 표현한 작가 때문에, 자꾸만 비행의 '행'을 행운과 연결시켜 보고 싶은데, 김애란 소설은 아니다.
그녀의 단편 대부분이 밝지 않다. 시간이 가면서 나이가 들면서 좀 달라지는 것 같은데, 이건 그렇다는 느낌뿐이다. 왜냐고?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냥 읽으면서 가슴 한편에 찡한 감동이 오면 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들은 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그렇다고, 비슷한 듯하면서 다른 색깔을 갖는 작가들인 편혜영, 권여선 등을 서로 비교할 능력이 없으니, 잠시 보류하고. 그녀들의 소설을 읽으면 자꾸 마음에 와닿는 게 많아진다. 그래서 유명 작가지만, 유명해서 마음에 와닿는 게 많아진 것 아니다. 이건, 분명히 해야겠다.
작가들이 이런 글들을 쓰면 독자 누군가는 그들 글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읽어내고, 공감하고, 위로를 받고, 세상을 버텨줄 힘이 되는 걸 알고 그러는 걸까? 이런 느낌은 사실, 그녀의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2011)을 읽고부터 느낀 감정이었다. 소설가 김애란에 대해서 말이다. 그녀 글 속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정서로 보면, 뭔가의 부족과 결핍이, 완전하지 않은 우리 모습들을 묘사한 그들이, 그들에 대한 서사가 다른 사람의 정서를 꽁꽁 묶는 올가미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니 또 드는 의문. 작가들은 아는 걸까? 자기가 쓴 글이 다른 사람들의 정서에 와닿는 게, 작가 스스로 특별나지 않기에, 우리가 느끼는 보편적 정서에 포함된다고. 난 그저 그 부위를 건드릴 뿐이라고.
이 대목에서 코알라가 생각났다. 코알라가 하루 18시간 이상 유칼립투스 입만 먹고 나무에서 자는 것은 그 잎에 있는 알코올 성분 때문인데, 이게 엄청 독하단다. 이를 분해하는 방법은 장내 세균뿐. 코알라 새끼는 장 내에 이 세균이 없을 테고. 어떻게 해결할까? 엄마의 똥을 먹으면서 장내에 세균을 증식시키는데, 이게 훌륭한 작가의 역할 같다는 것이다.
유대류인 코알라 새끼가 세상에 나가기 위해 엄마 똥 속에 있는 온갖 세균을 자기 장내에 옮겨 세상을 살아나가듯이, 작가는 세상에 대해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이 일부 경험하고 느낀 생각들을 날줄과 씨줄로 튼튼히 잘 엮어, 미숙한 나 같은 사람에게 백신을 마구 뿌려주는 역할 말이다.
그걸 맞든 지 말든지 그건 우리들 자유고. 작가들이 이런 존재들인 것 같다. 그래서 김애란 소설들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아련하고, 애틋해져도, 읽다 보면 신기한 게 정말 이상하게도 이게 힘이 된다. 세상을 이겨낼 힘 말이다. 마치, 어린 코알라 장 속에 늘어나는 세균들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