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 기는 독자

레이먼드 카버(2014). 대성당. 문학동네

by 길문

뛰어난 작가에 평범한 독자라니. 이 구도가 맞다. 이래야 한다. 독자가 작가보다 뛰어나면 될까? 작가들 뭘 먹고살라고. 독자가 이래저래 간섭하면 글이 써질까?


그저 상상인데, 상상은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이뤄질 수도. 상상은 공상이 아니니까. 그럼, 레이먼드 카버처럼 돼볼까? 이건 망상이다. 몽상도 아니고. 망상.


동시대, 아니 전시대를 걸쳐 최고의 단편소설가로 칭송되는 레이먼드 카버. 글쎄다. 그런 평가를 평가할 위치가 되어야 말이지.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는 위치가 될까? 이건 몽상에 가깝다. 평범한 독자. 이건 확실한데, 카버가 뛰어난 작가인 것 같은 생각은 책을 읽으면서 들기 시작했다. 남의 평가 빼고 말이다. 이유인즉, 단편집 첫 단편 <깃털들>을 읽는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집중이 안 되던데, 몸이 피곤했나?


읽다 말고, 뭐 이게 소설? 뭔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마음에선 계속 구시렁구시렁거렸다. 불행하게, 그때 같이 읽던 한국 단편소설이 흡입력이 좋았다. 그게 뭐였냐고? 그건 비밀! 도서관 반납하라는 문자를 받기 싫어서 일단 선반납. 이게 가능했던 것은 카버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누군가 카버에 대해 쓴 글들이 인터넷에 차고 넘쳤다. 그래서 생각하니, 이 책은 언제든지 빌릴 수 있으리라. 그래서 과감히 반납!


잘했군, 잘했어. 머리도 좋지 않지만, 기억력도 가물가물해져 읽은 책도 기억이 잊히는데, 읽지 않은 책이 기억이 날까? 그런데, 화장실 가서 그냥 나오는 사람 있던가? 그래서 도서관 이력을 보니, 그 책이었다. 아, 재미없던 책. 그러다 다시 빌렸는데, 역시나 <깃털들>에서 진도가 또 멈췄다. 이때, 해결책은 그냥 나를 세뇌시키는 것. 다 이해한 것처럼 이해하기로 하기. 그래서 다음 문장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침실로 들어가 아이를 가졌다."


<체프의 집>은 거의 공짜로 살던 집을 비워달고 한다. 그래서 비워줬다. 이게 다다. 이게, 훌륭한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이다. <보존>은 뭔가 봤더니, 실직한 남편이 소파에서 생활하고, 집에 있던 냉장고가 고장 난 얘기다. 그래서, <보존>인데, 아버지를 회상시킨다는 경매에 간다고 해서 설렌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칸막이 객실>은 더 난감하다. 해체된 가족의 가장, 이때 가장이란 단어가 가능할까? 가족이 해체되었는데. 암튼, 그가 아들을 만나러 스트라스부르(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있다)로 간다. 밀라노에서 떠났는데, 이 역에 내리지 않는다. 아들이 기다릴 것으로 알면서도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동기는 아들 줄 선물인 시계를 잃어버려서인데, 갑자기 '자신의 청춘을 집어삼킨 아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아 참! 이런 아버지도 있을까?


그러면서, 점차 이 단편집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라! 이 작가 봐라? 뭐 이래? 냉소적인 듯한데, 그냥 벌어진 일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 같군. 그러면서 읽은 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으면서는 그냥 빠져들었다. 아들 스코티가 등굣길에 차에 치여 병원에 실려갔는데, 그래서 그 아이가 회복돼서 아빠, 엄마가 마련해 준 생일 케이크를 맛있게 먹을 줄 알았더니, 애는 그냥 죽는다. 제과점 주인은 주문한 케이크 찾아가라고 전화하고. 내용이 스릴러가 될 뻔. 아빠, 엄마는 자기들을 괴롭히던 빵 주인이 그냥 빵 찾아가라고 전화한 것을 알게 되고. 그러다 빵 장수가 대접한 롤빵을 먹는 얘기. 혼자 사는 중년 남자와 자식을 잃은 부부가 정말 별것 아닌데, 서로 위로가 되고.


단편들 내용이 다 이렇다. <기차 - 존 치버에게>는 뭔가 봤더니, 존 치버가 쓴 단편 <다섯 시 사십팔 분>을 이어서 쓴 거라고 한다. <기차>를 이해하기 위해 이 단편까지 읽어? 이건 일단 패스. 다음에 읽기로 하고. 그러고 보니. <존 치버의 일기>도 읽다가 재미없어서 포기했는데... 암튼, <기차>는 늦은 밤 어떤 역에서 세 사람이 같이 탔다. 그 사람들이 일행이 아니다 라는 얘기.


<열>은 바람난 아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으면서, "그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라고 끝난다. 그만 투덜대야겠다. 읽는 사람 열받거나, 다 알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너만 이제야 레이먼드 카버 책 읽냐고, 뒤통수가 근질근질거린다.


아무튼 드디어 마지막 단편 <대성당>. 이 단편집의 대표 단편. 아내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맹인이 집에 찾아와 그를 경계하던 남자가 맹인과 같이 텔레비전을 본다. 으하하. 맹인과 보다니. 그 프로그램이 다큐인가? 각국의 성당을 다루는?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 포르투갈 성당을 보여주는데, 이를 맹인에게 남자가 설명을 해준다. 그러자, 맹인이 같이 성당을 그리자고 한다.


그러면서 맹인이 한다는 말.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이보게,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라던가, 맹인과 같이 성당을 그리면서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라던가.


이 책은 이런 식이다. 이런 게 어디서 얼핏 본 '더러운 리얼리즘'인가? <깃털들>에서 덜컹거리며 출발했던 기차가 축축할 정도로 습한 밤안개를 떠돌다, 비몽사몽 도착한 책의 결말이다. <대성당>을 마지막에 배치한 의도가 의심(?)스러워졌지만, 날아다니는 작가니 그러려니 했다. 그냥, 발발 기기로 했다. 이 담담함. 아니지 무덤덤함인가? 이건 불안하고, 불편한 소시민들이 느끼는 애환이기에,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계속 기는 독자로 남기로 했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아, 행복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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