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소설을 읽는다고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소설을 쓰고 싶다면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소설을 왜 쓰는지 그게 선행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소설은 뭘까? 이게 뭔지 질문하면서 소설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소설을 쓰는 작가와 소설을 읽는 독자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소설 평론가는? 글쎄다. 소설을 평하는 사람들까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확실한 것은 소설은 소설인데 말이다.
누군가 그랬던 것 같다. '소설은 쓸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라고. 그래서 소설이 공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친구들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하는 말. 소설 쓰고 앉아있네. 사실이 아니라는 말. 비현실적이라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인데, 그게 역설적으로 소설의 힘인 것 같다. 마치, 현실에서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에 대한 것. 일어났던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이를 다시 생각해 보면 소설이란 형식을 거치면 모든 것이 쓰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은 뉴스와 기사, 논문과 에세이 등과 다르다. 쓰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주제나 서술 혹은 서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만이 가장 힘이 세다는 틀린 것 같다. 저울에 올려놓고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노릇이다.
대상은 편혜영이 쓴 '포도밭 묘지'가 되었다. 역시나 그녀였다. 언젠가 작가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 무수히 많은 문학상 수상을 이뤄냈다. 이게, 그녀의 역량을 의심하지 못하게 하는 증거다. 여상 출신 청년들의 삶과 애환. 이게 딱 맞는 수식 같은데, 이를 비주류, 인 서울이 아닌 대학을 나온 요즘 청년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우리 주변, 일상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이를 공감하게 만들다니.
범죄 용의자와 범죄 심리학자의 관계를 다룬 '진주의 결말'은 누가 영화로 만들어도 될 정도의 흡입력을 갖게 만든다. 아니, 이런 장면들은 자주 바라본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양들의 침묵〉도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도 작가가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과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힘에 대해 세밀한 집중을 요하게 만든다. 말이 어렵지?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세계가 쉽게 독자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고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역시라는 부사를 남발하게 만드는 김애란의 '홈 파티.' 뭘 말하지? 의아해서 심사평에 의지했었다. 이 작가의 섬세함과 시각이라니.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소설가가 쉽게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작가. 경제적 윤택함이 어떻게 사고와 대인관계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지, 거대 담론으로 떠들어대지 않아도, 우리 안의 속물근성을 터트리게 만드는 작가의 예리함이란. 어쩌면 이 근성이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 위로를 향하게 한 채찍이었던 것 같은데, 살면서 이를 얼마나 인정하게 될까? 자기 안의 이런 속물 심성을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하게 될까 궁금해진다.
정한아의 '일시적인 일탈'이야말로 소설이 쓸 수 없는 것도 쓸 수 있는 것이 맞는 말 같았다. 우연히 친하게 된, 서로 의지하게 된 두 여성 중 한 명이 스스로 곧 줄을 것 같다는 예언처럼 죽어버리게 됨으로 해서, 혼자 남게 된 여성이 보이는 "과도한 애도"가 죽은 자의 공간에 머무르는 것이라면, 아니 머무른다는 게 비현실적이지만, 죽은 그녀가 산 그녀의 분신은 아닐는지. 이를 생각 속에서 투영해 내다니. 이게 쓸 수 없는 것을 쓰게 하는 소설의 힘인 것 같다.
작가 문지혁은 몇 살일까? 그가 쓴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는 지나도 한참 지난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미국에서의 9·11 테러, 일본의 동일본 대지진까지 시간 여행을 하게 한다. 다른 작품처럼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평가하긴 어렵지만, 읽는 내내 작가가 구현하는 현실이 과거와 조우했을 때 이게 어떻게 소설로서의 성취를 달성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든 생각. 소설의 범위와 소설로서의 성취, 그 경계는 어디일까?
백수련의 '아주 환한 날들'은 두 번째 읽었는데, 그 첫 번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서 읽었더라? 대게의 문학상이 그해 발표된 소설들이 대상이기에 어디선가 분명히 읽은 내용이다. 그러니, 가장 쉽게 읽은 소설. 칠십 줄에 들어선 여성이 집안에 불가피하게 들여놓은 '앵무새'로 인해, 살아온 과거와 현재를 뒤돌아보게 만드는데, 이건 남성이 쉽게 이해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엄마가 갖게 되는 누군가의 돌봄 행위가 그 연령대 아니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물어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을 읽고 나서 여기 작가들처럼 소설을 쓰고 싶은지? 얼마나 읽어야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정말, 무수히 많은 책을 읽으면 이런 작가적 역량이 생기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럼, 소설을 왜 읽을까?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그럼, 사회에 소설가가 넘쳐났겠지? 양질전화라고 훌륭한 작가는 더 많았을 테고......
소설가가 무수히 많은 소재들을 다뤄 소설로 만든다고 해서 세상이 더 좋아지고 달라졌다는 그 결과는 찾기 어렵지만, 적어도 소설을 더 많이 읽다 보면, 어느 독자도 나도 쓰겠는데라는 믿음 아니 착각이라도 늘 것 같기는 하다. 이게, 사회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던가. 이게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퍽퍽한 일상에서 자존감만큼은 슬그머니 키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나도 '소설'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