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기억을 묻으며

by 사월의 미도리

이따금씩 책을 읽다 말고 책 냄새에 이끌려 책 속에 코를 파묻는다. 나무의 향. 종이로부터 모든 냄새가 났다. 나는 해수의 짭짜름한 냄새를 맡았고 나이테의 연륜의 냄새를 맡았다. 내가 두고 온 어딘가의 낮은 수평선이 보였고, 적막함으로 가득한 공기의 냄새도 맡았다.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이윽고 한국에 두고 왔던 어느 기억이 흐른다. 베란다 창문을 뚫고 코 밑으로 전해지는 구수한 냄새에 언니와 내가 “삼겹살 굽는가 보다”하고 서로 피식거리며 베란다 너머를 바라보던 장면. 불안을 머금은 밤공기가 내 숨으로 토해져 나오면 이윽고 보이던 외로운 가로등. 나방과 모기들이 가로등에 달라붙어 서로 씨름을 하던 가로등 불빛 아래에 내가 스물둘의 세월을 조용히 묻고 있던 장면. 익숙한 냄새와 장면이 머릿속에 출몰할 때면 또다시 머리가 지끈해지며 기억이 저며온다. 3층에서 바깥을 바라보면 비릿한 밤공기가 내 방을 채우던 장면.

책을 넣고 다시 길을 걷는다. 돌담 사이사이의 틈에 모든 통증과 환희를 숨겨놓은 것처럼, 이 길을 걷는 동안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오기도 하고 행복했던 추억마저 아련한 옛일이 되어 다가온다.


본래 내 눈물은 늘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으로부터 흐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눈물이 나올때 그 이유가 정확히 뭔지, 어떤 모양의 슬픔이며 우울이며, 나 자신도 몰랐다. 지금 보니, 수평선이 아닌 지평선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흐르는 것 같다. 내가 밟고 있는 땅 밑 깊숙한 어느 지점에 난 균열에서 눈물이 흐른다.


덥고 맹한 바람이 내 어깨를 데운다. 얼굴에 정면으로 습한 공기를 맞는다. 이 불안한 공기가 나를 채워 잠식해도 나는 결국 괜찮은거겠지, 라고 설득해본다. 날마다 날이 선 시험대 위에서 걸어다니며, 나 자신의 바닥까지 보여야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그립고 내가 조용히 젊은 날의 시간들을 묻어두던 색바랜 달밤이 그립고, 구미가 당기는 고깃집 냄새와 전철 소리로 채워진 서울의 불안한 밤공기가 그립다. 나, 여기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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