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기차

상해로 가는 기차안에서

by 사월의 미도리

달이 붉다. 주홍빛을 머금고 있다. 마른 나무들 사이로 달이 스쳐간다. 이 곳은 지구의 다른 곳보다 달에 가까운 듯, 조금만 앞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달이 내 앞으로 크게 다가와있다. 나의 땀샘으로 축축히 스며드는 마른 여름바람에 조금씩 마음이 안정적인 박자로 돌아온다. 마른 대지뿐인 줄 알았는데, 늘 그렇듯 태양은 뜨겁고 달은 차갑기만 한 곳인 줄 알았는데. 마른 저녁 하늘에 태양빛 달이 걸려 있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 반갑다.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발이 땅에 닿고 땅의 열기를 흡수했다. 기차에 들어서는 순간마다 닫아놓은 창문 틈에 끼어 있던 먼지부터 수십명의 땀구멍에서 나오는 노폐물까지 코 밑까지 전해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칭얼대며 우는 소리가 시끄러울 법도 한데 두 팔을 가슴에 포갠 채 깊은 잠에 빠진 남자 뒤로 수많은 나무들이 지나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 희미하게 보이던 나무들, 나무 뒤로 누군가 감히 칠해놓은 짙은 하늘, 네모진 창문 너머의 풍경에 저절로 멍해지던 마음.

기차에서 내려 발걸음이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손끝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낮 동안의 뜨거운 산소를 견뎌냈던 길가의 나뭇잎들이 나에게 한기를 토해내는 듯 하다. 죽어있는 것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오직 자연스러운 것만이 나와 함께 걷는다. 구름이 달을 가려 빛무리가 보이는 듯하다. 짙은 푸른색의 저녁 하늘 아래 옷을 벗은 나무들. 나뭇잎 한 장 걸치지 못한 나무들을 가로등이 비추니 너무나 춥다, 부자연스럽다. 그저 그대로 놔두면 나체의 나무들도 짙고 푸른 저녁을 만끽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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