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 상향비교를 대하는 자세
살펴보았던 내가 소유한 불안의 씨앗에는 정체가 있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적어두고자 한다.
최근 과거 직장동료의 소식을 SNS에서 알게 되었다. 더 조건이 좋은 회사로 이직했음을 알리는 글이다.
멀리서나마 축하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낮은 연차임에도 집요하게 노력하던 이로 기억한다. 본래 전공과 첫 회사는 기술분야가 아니었기에 부단히도 애를 쓰며 공백을 채우려고 했었다. 1시간여 회의의 톤과 공기를 모두 생략하고 단 몇줄로 요약할만큼 단호하기도 했다. 그가 회사를 떠날 때 후에도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이러한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오랫동안 연락 없던 지인이 혹은 스쳐갔던 동료가 무엇인가를 이루었음을 듣는다. 그것은 일적인 성취도 있지만 작게 나마 본인이 연 작은 전시회, 꾸준한 테마를 갖는 여행기록이기도 하다.
반면, 오늘 저녁 내 머릿속은 상대적 비교의 굴레로 다시 들어간다. 찾아보니 '상향사회비교'로 지칭한다고 한다. 사람의 사회 집단 속에서 발현되는 자연스러운 특성으로 정상적인 마음의 활동이라고 한다.
여기에 긍정적 태도를 취할지는 스스로에게 달려있기에 좋거나 나쁜 결과로 연결된다고 한다. 하지만 부정을 벗어나기는 힘겹다. 자주 보는 친구 중에도, 해마다 한 번 만나는 모임에도 힘든 시절을 지내온 이들은 심심치 않게 있다.
기묘한 것은 비교 아래에 깔린 또다른 감정이다.
비교는 스스로의 정체에 대한 떳떳함을 질문한다.
나에게는 3가지 변명이 있다.
첫째로 늦은 시작의 변명이다.
소식을 접한 이처럼 나 역시 사회생활 시작 몇년 후, 업종을 변경하였다.
모든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했다.
그렇기에 왠만한 뒤쳐짐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 눈을 감았다는 자기의심이 있다.
둘째로 환경의 머뭄이다.
제자리 걸음을 하며 경험의 질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대해서는 늘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환경을 바꾸기 위한 최선이 투영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로 집요함이다.
몇차례 기회가 주어졌던 시기들이 있다. 결과와 상관없는 성실함과 시야로 회사에서 주어진 운이다. 하지만 매번 마지막 직전에 무너지고 말았다. 늘 마지막 지점에 미칠정도로 집요한가에 대한 떳떳함이 없다.
압도적이지 않지만 꾸준함으로 기회가 왔지만 마지막 단추를 지독하게 쥐어지고 잠그지 못했다.
이러한 변명은 스스로를 보호하지만, 왜 어려움을 직접 마주하지 않았는지 돌아와 다시 묻는다.
차선에 차선을 선택하며 결국 정체하는 위치에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시작의 극복, 환경의 교체, 지독한 집요함.
'정체'를 만들어내는 것들이기에 그 결여에 힘이 빠진다.
그 마지막에 닿았던 다른이들에게 인정을 표한다.
퇴근 후의 시간도 이 의심에 자유롭지 않다.
놀림감이 되었던 친구의 취미는 이제 시간의 귀퉁이마다 심어둔 표식이 된다.
기록된 즐거움을 가진 이들에게 박수를 친다.
꽤 오랜기간 9시 출근, 12시 이후의 퇴근도 마다하지 않고 지냈던 시기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것을 반복하며 시간 외에 그 자리에 머물렀다. 반대로 쓸데없이 회사밖의 삶을 버렸던 시간이다. 결국 함께하고 싶은 동료로도 남지는 못한 것 같다.
여기까지다.
어디까지나 생각의 흐름일 뿐 감정까지 퍼져가지는 않는다.
나는 정체에 불안해하며, 정체가 발생하는 원인을 안다.
불안에 대한 자세를 선택할 수 있기를 알며, 무덤덤하게 흘려보내는 못하는 수준임을 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나는 우울함의 경계를 알며, 그 경계 뒤가 걷잡을 수 없음을 안다.
그렇기에 경계 앞에서 멈춰서는 방법을 오랜시간에 걸쳐 익혔다.
딱 이만큼의 불안으로 하루를 접는다.
띡 이만큼의 남은 힘으로 내일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