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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저녁 거실 선반 위에, 아이가 산타에게 쓴 편지가 놓여 있다. 꼼꼼히 적힌 글자들 사이에, 편지를 읽었으면 표시해 달라는 작은 빈칸까지 있다. 산타를 기다리는 마음이 크기가 조금씩 다른 글자들 사이사이에 스며 있다.
혹시 몰라 아이에게는 늘 아침까지는 산타가 다녀갈 수 있도록 방에서 나온다면 안된다는 약속을 해둔다.
작년에는 밤중에 누군가 걸어 다니는 소리를 들었다며, 아침까지 꾹 참았다 나왔다고 했다. 아이의 기대가 문틈을 나와 밖에서 거닐었던 모양이다.
나는 몇 살까지 산타를 믿었을까.
아마 다섯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 여섯 살 유치원에서, 산타 가발 속 검은 머리를 보고 아이들과 낄낄대던 기억이 난다. 그 나이를 넘긴 아이가 올해는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난 저녁 아홉 살까지 믿었다는 친구의 얘기를 들으니 내심 선물에 기뻐할 아이의 표정이 한편으로 기대됐다.
집마다, 분위기마다, 아이들이 현실과 마주하는 시간은 다른 듯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산타가 다녀가기를 기대하는 설렘의 크기는 같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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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는 다르다. 기대했던 날이 시작되자마자 크리스마스는 벌써 끝난 듯하다. 전 날 저녁의 설렘은 녹아 사라진 채 희미해진 여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한다. 더듬어 휴일이란 사실만 확인한 뒤에 소파에 누워 하루를 보낸다.
새해의 설렘도 12월 31일 마지막 날 밤까지이다. 한 해가 시작된 순간 새로운 기대도, 나이도, 한 해의 목표에 현실이 스며든다. 적어두었던 목표는 지키지 못할 것임을 깨달아 줄을 그어 지워둔다.
새해에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건 언제까지였을까.
성인이 된 뒤에도 꽤 오랜 시간 동안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을, 헤어짐을, 추억을 그리워하는 시간을 걸쳐 입고 매 해 다른 겨울을 맞았을 것이다. 그 사이, 크리스마스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길에서 캐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사라짐이 어색하지 않은지도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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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동안 아이의 시간은 많이 변했다.
친구와의 대화가 일상에 많이 젖어들었고 그들의 농담을 곧 잘 보았다. 어린 나이에 전화통화만으로 신기해하며 장난을 치고, 누군가의 집에 함께 몰려가 놀겠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친구와의 대화가 부모와의 대화를 앞서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내 한 해 시작의 모습도 변한 지 오래다.
한 해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질 때부터 설렘이 끼어들 틈이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에 변할 것이 없는 잔잔한 흐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괜찮다고 다독이는 시간도 방향을 트는 큰 결정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 단절이 있지는 않았다. 아마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없던 시기였을 것이다.
덕분에 최근 몇 년 간 매해 1월은 바쁘다. 1월에는 힘겹게라도 작년과의 선을 직접 그어내고 그 틈에 희망을 심는 작업을 해둔다. 늘 그렇듯 이번의 12/31에도 결과적으로 많은 희망을 거두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씨를 자리에 두는 설렘은 결과와 관련이 없다. 담아 온 만큼 내어낸 만큼의 기대를 1월의 기억에 남길 수 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설렘이 없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까지는 원하는 만큼의 설렘이 있다.
남은 일주일, 1월의 바쁨을 만날 채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