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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나를 닮은 위로

by 프랭크


내 회의록은 무디다. 몇 줄로 결과만 쓰면 될 것을 순간마다의 사실과 대립과 욕심과 거짓을 걸러 적어 넣다 보면 어지럽게 늘어진다. 압축하여 사실과 결정만을 골라내어 애를 써도 텁텁했던 회의의 공기가 사이사이에 담겨있다. 같은 회의에 참석했던 누군가의 회의록은 간략히 세 문장으로 끝나 있다. 나름 잘 줄였다고 느낀 방금 전의 회의록이 잔뜩 삵다.


내 퇴근길은 길다. 운 좋게 가까운 거리에 집이 있음에도 괜스레 잡다한 생각에 시간은 길게 느껴진다. 역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는 노선의 첫 번째 역을 떠날 때부터의 고단함이 묻어나고 그 모습이 하루를 보낸 나 같아 응원하게 된다. 손잡이를 잡으며 오늘 손해여도 마음이 편한 것을 택했던 순간에 스스로를 칭찬한다. 개찰구를 나올 때의 바닥 그림자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 걸음을 옮기며 그림자는 사라진 채 새로운 그림자가 나타난다.


참 쓸모없는 정서다.

<달을 쏘다>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적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시집은 작은 문고판임에도 아껴서 읽느라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윤동주 시인의 글을 읽으며 하루를 지내는 마음과 어려움이 그를 많이 닮아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는 현재의 회사생활을 떠올려 본다. 그도 아마 빠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칸 한 칸 이마다 걸리는 톱니에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감성과 사색은 성과와 속도에 딱히 맞지 않다. 하지만 하루뿐인 성과에 반해 정서는 1년을 어루만진다. 그가 가진 적합하지 않은 정서의 시집을 아껴읽은 덕분에 지난 연말과 연초 내내 윤동주 시인에 위로받았다. 나에게만 들렸을 위로의 울림을 받았다.


<산울림>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나는 대충 섬세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것에서 들리는 소리와 형체 없는 것이 엮여진 모양을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떠올린다. 오늘 아침도 회사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3번이나 멈칫했다. 문 손잡이를 잡은 손의 급한 마음과, 들고 나는 이들의 왠지 모를 엇갈림과 추워진 날씨 사이에 어제보다 밝은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날이면 마음이 어려운 것보다 영리하지 못하기를 택하는 사람들은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몽글한 무언가가 뭉툭한 대화를 채워 다른 이의 말을 귀담아듣게 한다.


<빨래>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 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하루를 되짚기는 늘 어렵다. 정서의 기억만 있을 뿐 적확한 단어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윤동주 시인이 섬세하게 골라 담아둔 글로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음에 연말 내내 고마웠다. 그의 시를 느낄 수 있는 대충의 정서를 가졌음에 다행함을 느꼈다.

<못자는 밤>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회사 생활에는 약속된 거짓됨 같은 것이 있다. 반갑지만 텅 비어 있는 것, 경청이지만 기억하지 않는 것, 고려하지만 양보하지 않는 것. 어떤 것이든 살짝 비틀어진 예의를 암묵적으로 주고받는다. 이런데 능숙하지 못한 스스로를 출근길에 자책하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는 시간도 이제 꽤 쌓였다. 어깨동무하는 자책의 손을 떼어낼 만큼의 요령은 충분히 있다.

<자화상>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모처럼 평화로운 주말이다. 지난 토요일이 되어서야 책 읽기를 마쳤다. 왜인지 한 시가 생각나 다시 읽어보았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에는 다른 순간이 있다. 그 다름은 익숙한 정서 위에서 느낄 수 있다.


참 쓸모있는 정서다.


<귀뚜라미와 나와>

귀뚜라미와 나와
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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