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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랭크 May 11. 2024

잠식과 환청

어느 팀장 이야기 9

아내에게 오늘 밤에는 집에 갈 수 없다는 연락을 몇 차례 전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감사과정동안 맡은 자잘한 일들은 주간 업무와 회의를 마치고 저녁 7시 퇴근 후 시간부터 진행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막차를 놓친 시간이었다. 복잡한 일들은 아니었지만, 내가 처리하는 속도는 이상하리만치 느렸고 늘 몇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떤 날은 연달아 이틀 동안 퇴근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이른 아침, 동료들이 조식을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지났다는 감각도 그 주에는 잃어갔다.

 금요일 저녁, 간신히 퇴근해 집에 돌아왔지만 다음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스러웠는지 집에 오셨고, 아내와 함께 최근의 근황을 이야기 나누었다. 대화 중에 불현듯 어제 회의실 칠판에 그려놓았던 시스템 구조도가 떠올랐다. 대외비를 노출시켰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회사에 가야 한다며 덜덜 떨며 이야기했고, 결국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한 시간 여를 달려 회사에 도착했다. 회의실에는 어제 그린 간단한 구조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작은 네모 상자 몇 개와 희미한 화살표로 이어진 그림이었을 뿐이었지만 칠판을 지운 뒤에서야 몇시간 동안 이어진 두려움이 꺼졌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 다시 월요일이 되었다. 그 날 오후, 팀원 몇몇이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슬쩍 나를 쳐다보고 서로 비웃는 표정을 주고 받으며 서로 속삭였다. 한심한 리더에 대한 조롱섞인 농담임을 직감했다. 짐짓 모르는 척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 후로 감사합니다라는 의례적인 메신저 대화 뒤에 겉으로 표시되지 않은 불만족스러움이 느껴졌다. 팀원들의 날선 의혹들이 메세지와 대화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찔러댔다. 팀의 공지사항을 공유할때 텅빈 팀원들의 눈동자를 보며 신뢰를 잃은 나 자신이 보였다. 그들은 자격 없는 나를 감시하는 듯 보였고 나 또한 무능한 존재인 내가 혐오스러웠다. 수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지부진한 스스로의 역량과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아 도태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구토가 올라왔다. 사무실에 출근하는 매일의 두려움이 점점 나를 잠식해 갔다. 그리고 팀원들의 속삭임도 매일 귀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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