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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로스의 추락에 대한 고찰

이카로스의 추락에 대한 고찰


1.

신화나 전설이란 것이 그러하기 마련이듯,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가슴에 내려 앉을 때에야 비로써 유효성을 갖게 된다. 인간의 가슴은 그 자체로 높고도 파란 하늘이며 가없이 넓은 우주이기도 하니 '어떤 것에 대해 부여하는 유효성'에 관한 당위성은 누군가의 가슴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것이 시사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것들 중에 한 가지는, 많은 부분에서 신화의 영역과 겹쳐 보이기도 하는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공간으로 어떻게 끌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은 언제나 냉철함만을 최전방에 내세우기 마련이라서, 인간이 자신의 어깻죽지에 ‘스스로 날개를 다는 것’과 같은 비이성적인 환상의 도입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야기의 주인공 격인 이카로스가 착용한 날개조차도, 자신의 아비이면서 자신을 가두었던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장본이고, 미궁에 갇혀야만 했던 원인의 제공자이기도 한 다이달로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이카로스의 능동성보다는 수동성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만들지 못한 날개’를 몸에 부착해야만 했던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현실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비이성적이고 타의에 의한 수동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수동성과 비이성적인 내용으로 인해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뇌리에 더욱 새겨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카로스에 반해 그 아비인 다이달로스는 미로와 날개를 만든 기술적인 장인이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과 인간의 경계에까지 오른 최고의 현인으로 칭송받는 인간이다.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보자면 이야기의 주된 주인공이 아니지만 마치 주인공인듯 보이는 이카로스와, 내용 상에서는 주인공임이 분명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되는 다이달로스, 이들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증을 풀기 위한 단초를 찾아 나서게 된다.


아비와 아들이라는 진한 혈연적 관계를 잠시 접어둬 보자. 이카로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미궁에 갇히게 된 것이고 그 죄를 지은 타인의 도움으로 인해 수동적으로 날개를 달고 그 미궁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타인이 바로 자신의 아비이니, 이카로스가 지은 죄는 연좌제로 의해 뒤집어 쓴 죄로서 일종의 원죄에 해당하게 되고, 이카로스의 추락은 그 원죄에 대한 형벌이라 할 수 있다.



2.

비록 물리적인 물질과 이에 연관된 현상을 기반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세상이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갇히지 않는 한 자신을 온전히 가둘 수 있는 정신적인 구조물의 설치를 허락하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성적인 수단을 따라 인간을 가둘 수 있는 정신적인 미궁은 원칙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나 미로에 갇힌 것 같아’와 같은 말을 주문처럼 주절거리고, 때로는 그 말을 되뇌이면서 스스로를 미궁에 가두는 비이성적인 일을 벌일 때가 있다. 스스로에 의해 또는 누군가에 의해, 어떨 때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미궁에 갇힌 것 같이 먹먹하고 이물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때가 발생하는 것이다.


미궁이 실제로도 존재하든 아니든, 그 미궁이란 것이 스스로 만든 것이든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든 간에, 인간은 어떤 미지의 미궁에 갇혀 들게 되고 그것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으로 이카로스가 어깻죽지에 달아 붙였다는 날개를 찾게 되는, 비이성적인 존재로 변신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아주 잠시라 하더라도, 어쩌다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된다면, 자신이 갇힌 미궁의 입구를 인지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그 미궁 안으로 들어서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이미 너무 깊숙이 들어 선 후에야, 수많은 방황과 처절한 좌절 속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며 헤매고 난 후에야 인간은, 자신을 애워싼 미궁을 인지하게 되지만 그때조차도 애써 그 미궁의 실체를 부인하려 들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다. 나약하고, 스스로에 의해 정신적인 미궁에 빠져들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조차도 늘 때가 늦어지는 것이 현실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인 게다. 그러면서도 희망이라 부르는 것에게 닿은 가느다란 끈의 끝자락이나마 놓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인간이다.

이상의 날개처럼 훨훨 높이 날아 작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의지는 ‘꼭 그럴 수 있고 반드시 그러하여야만 하는', 인간만의 자유의 의지이기도 하다.



3.

몇몇 허술해 보이는 구성과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틈새로 인해, 그것들은 비록 의도된 장치일 수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로 알려진 이 신화에 대한 해석은 분분해질 수밖에 없다. 깊지 못한 지식이나, 자신의 감상에 도취된 채 어둠 속에서 이것을 더듬다가 보면, 이카로스 달았다는 ‘날개’라는 것이 아주 특별한 선물이어서 이카로스 자체가 아주 특별한 존재인 듯 여겨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원인은, 이카로스가 아주 젊었다는 것과, 자기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높이 하늘을 오르려 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젊은 몸뚱이에 높이 오른 하늘]이 주는 이미지는 ‘창공’이라는 도전적 메시지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어느새 이카로스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 창공을 자유로이 날고자 한 도전적인 젊은이’의 이야기로 확대 해석되기 일쑤가 된다.


또는 ‘추락’이라는 다소 부정적 현상에 주안점을 두는 해석의 경우에나 사회적인 교훈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를 가진 해석의 경우에는, 치기 어린 자신의 젊음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결국 그 자신과 아비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충동적인 젊은이의 모습으로 이카로스를 몰아가기도 한다.


시대적으로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던 중세시대에서는 ‘하늘’이 곧 ‘신’의 영역이었고, 하늘에 대한 도전은 신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으니, 이카로스의 추락은 금지된 신성에 도전한 어리석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형벌로 인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지 간에 좋다. 이카로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게 되고, 어떠한 방향으로 해석이 나아가든, 애초에 이 이야기를 옮겨 기록한 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해석은 ‘깊이 생각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비행의 소재일 뿐이다. 이제 젊은 이카로스의 비행은 깊이 생각하는 이의 자유로운 사유의 비행이 된다.


비행을 한다는 것이 비록 이카로스와 같이 추락을 동반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은 인간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언제든 존재하였고 존재하고 있고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창공이라는 단어가 갖은 특별하고 뜨거운 유혹과 강력한 마법 때문일 것이다.


‘추락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 비상’을 무모함이라 얘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니 대부분이 무모하다는 입장에 입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살만큼 살아보니 그들의 입장에 대해 이해가 가긴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 판단을 현명하다고 여기 지게 되기에 그 비상을 무모함이라고 말하는 주장은 분명 이성의 작용에서 끌려 나온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삶이 이성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그 무미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면 이 세상이 과연 이성적인 판단이나 사고만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이성적으로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성을 따르지 않는 이를 과연 비이성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녀 또는 그가, ‘나는 나의 초이성을 따르는 것뿐이야’라고 한다면, 어떤 이성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


시인 이상의 시 <날개>의 한 토막이, 싱싱한 날것의 한 토막처럼 푸드덕 몸을 튕기고, 마치 익숙해진 유행가의 후렴처럼 입안을 감돌고 있는 것은 어쩐 이유일까.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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