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카라바조, 나폴리에서 몰타로(1607-1608)

32. 카라바조, 나폴리에서 몰타로(1607-1608)


카라바조는 나폴리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달 만에 이 도시를 떠난다. 카라바조가 몰타로 간 것은 그의 사면을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에서는 비록 참수형이 선고된 범죄자의 신분이지만 자신을 재능이라면, 몰타라는 작은 섬나라에서는 유명 기사단의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사면의 기회에 좀 더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카라바조의 이러한 판단에는, 몰타라는 섬이 비록 지중해에 있는 작은 섬일 뿐이지만 [성 요한 기사단](Knights of st. John)의 본거지라는 점과, 크기가 작은 만큼 그의 천재성이 더욱 돋보일 것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시대는 종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가톨릭 사회였다. 따라서 몰타에서 기독교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의 일원이 된다면,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로마의 귀족 및 고위 성직자들의 힘에다가 성 요한 기사단의 명성을 덧붙여서,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카라바조가 1607년에 몰타에 도착한 것은 성 요한 기사단의 단원이자 당시 갤리선의 장군이었던 [파브리치오 스포르차 콜론나](Fabrizio Sforza Colonna)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몰타에서도 콜란나 가문은 카라바조를 받쳐주는 든든한 기둥이었다.

몰타에 도착한 카라바조는 당시 성 요한 기사단의 총책임자였던 [알로프 드 비냐쿠르](Alof de Wignacourt)의 도움을 통해 토마소니의 죽음으로 인해 내려진 로마 사법 당국의 선고에 대해 사면을 받기를 바랐다.


알로프 드 위냐쿠르는 로마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였던 카라바조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그를 성 요한 기사단의 정식 단원이자 공식 화가로 임명하였다. 카라바조에 대한 기록을 남긴 전기 작가 벨로리에 따르면 카라바조 또한 그에게 수여된 기사 작위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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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의 참수> (The Beheading of Saint John), 370cm × 520cm, 1608, Saint John's Co-Cathedra, Valletta, Malta



카라바조가 몰타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주요 작품으로는 ‘서양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에 하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성 요한의 참수>(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 370cm × 520cm, 1608, Saint John's Co-Cathedral, Valletta, Malta)가 있다. <성 요한의 참수>는 카라바조가 남긴 작품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큰 작품이다.

또한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중에는 유일하게 '카라바조의 서명'이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성 제롬의 글쓰기>(Saint Jerome Writing, 117cm × 157cm, c.1607–1608, Saint John's Co-Cathedral, Valletta, Malta)가 있다.


<성 제롬의 글쓰기> (Saint Jerome Writing), 117cm × 157cm, c.1607–1608, Saint John's Co-Cathedral, Valletta, Ma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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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개의 작품 <성 요한의 참수>와 <성 제롬의 글쓰기>는 작품을 외뢰한 몰타의 발레타에 있는 [성 요한 공동 대성당](Saint John's Co-Cathedral)에 지금도 걸려있다.

또한 당시 성 요한 기사단의 총책임자로서 카라바조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한 알로프 드 비냐쿠르를 그린 <알로프 드 비냐쿠르와 그의 시종의 초상화>(Portrait of Alof de Wignacourt and his Page, 195cm × 134cm, c.1607-1608, Musée du Louvre, Paris)와 같은 작품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Portrait of Alof de Wignacourt and his Page(1607-1608).jpg

<알로프 드 비냐쿠르와 그의 시종의 초상화> (Portrait of Alof de Wignacourt and his Page), 195cm × 134cm, c.1607-1608,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카라바조는 몰타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십분 활용하여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고 이로써 로마로의 복귀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본성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사 작위를 받아 성 요한 기사단의 정식 단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카라바조의 행실은 바뀌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1608년 8월 말에 벌어진 다른 귀족 기사와의 싸움으로 건물을 크게 손상시켰으며 그 기사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화가 카라바조가 싸움에서 기사를 부상 입혔다니, 화가의 붓이 기사의 칼을 이겼다는 말인지, 화가가 기사보다 싸움질을 더 잘했다는 것인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일 수 있다. 만약 기사가 원래부터 부실했는데 집안 배경 덕에 기사 작위를 받은 것이라면, 제놈의 주제를 알고 카라바조와 같은 인물과 싸움질을 벌리지 말았어야 하는데도, 아마도 카라바조가 화가였기에, 화가라면 유약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에, 시비가 붙었고 그 결과 부상을 입게 된 것일 수 있다.


카라바조는 그 사건으로 1608년 8월 말에 발레타의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어떤 영문인지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이 탈출에 대해서 "담벼락을 기어올라 탈출했다."는 식의 ‘왠지 그래야만 카라바조 다울 것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는 있지만, 카라바조에 얽힌 다른 많은 이야기처럼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성 요한 기사단은 그해가 가지 전인 12월에 카라바조를 ‘부정하고 부패한 회원’이라는 사유로 기사단에서 제명시켰다. 카라바조의 공식적인 제명 사유인 ‘부정하고 부패한’이란 표현은 다른 회원을 제명시킬 때도 사용하는 일반적인 문구이므로 이 일로 인해 카라바조를 '부정' 또는 '부패'와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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