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지 Jun 06. 2023

박쥐의 잠

거꾸로 매달려 자기


어렸을 적, 놀이터에 아무도 없을 때면 높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쉬곤 했다. 뒤집혀 보이는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혹은 눈을 감고 선선히 부는 바람을 쐬다 보면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그대로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매달려 있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철봉에 기억 자로 걸쳐 놓은 두 다리가 저려왔고, 결국 난 더는 못 버티다 한 바퀴 공중제비하며 착지해야 했다.


아마 내가 박쥐였다면 그 정도야 문제 없었을 거다. 대부분의 박쥐는 날아다니는 순간을 제외하곤 늘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까.


날개를 온몸으로 감싼 채 나뭇가지에, 동굴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박쥐들 (사진 출처: iStock / Wisconsin Public Radio)


박쥐는 하루에 15-20시간까지도 매달려 있을 수 있다. 그 상태로 새끼에게 젖을 먹이고, 쉬기도 하며, 심지어 잠까지 잔다.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박쥐는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 거꾸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박쥐의 ‘거꾸로 자세’ 유지 비결


첫 번째 비결은 바로 '타고난 굽은 발'에 있다. 박쥐 다리의 근육과 뼈를 연결하는 부위엔 특별한 힘줄이 있다. 박쥐가 온몸에 힘을 빼고 쉬고 있을 때도 이 힘줄은 발끝을 확 잡아당긴다. 그래서 자연스레 무언가를 움켜쥐기 용이하게 구부러진다.


인간은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도 잠이 들면 스르르 손가락이 풀리지만, 박쥐는 아니다. 몸을 이완시킨 상태에서 오히려 힘줄이 더 타이트하게 당겨진다. 그럴수록 발끝은 단단히 잠기듯 구부러지고, 발가락을 벌리는 건 더욱 어려워진다. 덕분에 보다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매달려 있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그 상태로 죽기까지 한단다. (거꾸로 매달린 박쥐 무리 가운데엔 이미 저승으로 가 있는 박쥐가 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갈고리 모양을 닮은 박쥐의 발. 가볍게 걸친 듯보여도 오래도록 잘만 매달려 있다 (사진: Roundglass Sustain / iclickart)


몸이 가볍다는 점도 '거꾸로 라이프'에 기여하는 부분. 박쥐는 포유류 가운데 유일하게 날 수 있는 동물인데, 날기 위해 몸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1200여 종의 박쥐 대부분이 온스 단위 무게이며(참고로 1온스는 28.35g), 지구상에서 가장 큰 박쥐도 1kg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다. 그만큼 체내 피의 무게도 적게 나가니 거꾸로 오래 매달려 있어도 혈액순환에 큰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박쥐보다 훨씬 무거운 인간은 거꾸리 자세를 너무 오래 유지하면 피가 머리쪽으로 쏠려 뇌에 압박이 가해진다.)


집박쥐(pipistrelle)는 성냥갑 안에도 넣을 수 있을 만한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다. 영국에선 주택 지붕 타일 아래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사진 출처: Getty)


새들은 날기 위해 뼛속를 비우는 방법으로 무게를 줄이며 진화했지만, 포유류인 박쥐는 뒷다리 뼈를 더 짧고 얇게 만들면서 몸무게를 감량해나갔다. 그러다 보니 박쥐는 몸을 지탱하고 서 있기 힘들어졌다. 특별한 힘줄의 도움을 받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훨씬 안정된 자세가 된 것이다.



박쥐는 왜 만날 거꾸로 매달려 있을까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박쥐에게 여러모로 유용한 포즈다. 무엇보다도 언제든 재빨리 달아날 수 있다. 박쥐의 천적인 올빼미나 매, 뱀 등이 언제 어디서 습격해올지 빠르게 스캔한 뒤 위험한 순간 곧바로 날개를 펼칠 수 있다. 다른 새들처럼 중력을 거슬러 날아 오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박쥐는 단지 동굴 천장이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날개를 펼치며 하강하면 된다.


하지만 박쥐라고 다 똑같진 않다. 거꾸로 매달려 지내지 않는 박쥐만 7종이다. 미국 중남부에 6종이, 마다가스카르에 1종이 있는데, 그중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빨판박쥐(sucker-footed bat)는 머리를 앞으로 향한 채 말려 있는 커다란 잎사귀 표면에 붙어 잔다. 빨판박쥐의 크기는 겨우 5cm 남짓이며, 몸무게는 3분의 1온스다. 나뭇잎에게도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크기와 무게다.


마다가스카르 빨판박쥐. 돌돌 말린 나뭇잎은 그들의 아늑한 침대다 (사진 출처: flickr)


사실 박쥐는 배트맨 같은 캐릭터를 떠올리지 않는 이상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지구를 휩쓸었던 시기, 바이러스 감염 병원체의 기원이 박쥐였다는 보도가 쏟아지면서 왠지 모르게 기피해야 할 동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사스와 에볼라, 메르스 등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모두 박쥐에게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박쥐는 어느 기사 속 표현에서처럼 그야말로 "200종 이상의 바이러스가 모인 저수지"였던 것이다!)


밤하늘을 나는 박쥐. 배트맨 로고가 날개를 펼친 박쥐 모습이었다는 걸 실감케 하는 장면 (사진 출처: Torch magazin)


그래도 멕시코긴혀박쥐처럼 열대 과일과 식물의 씨앗을 퍼뜨리고 꽃가루받이를 하는 박쥐도 있다. 이런 박쥐들은 열대림 복원에 일조하는 존재들이다. 그래, 박쥐라고 다 같진 않은 것이다. 어떤 박쥐들은 거꾸로 매달리지 않기도 하고, 바이러스 전파보다 꽃가루받이에 더 열심이기도 하니까.


혓바닥을 꽃에 내밀고 있는 몰디브 숲속의 한 박쥐(왼쪽). 오른쪽은 꽃을 찾아 날아온 멕시코긴혀박쥐 (사진 출처 : Getty image / Wikimedia commons)



* 참고 자료

- <This is why bats are able to sleep hanging upside down>, Jul 23 2016, www.businessinsider.com

- <Why do bats sleep upside down?>, La Trobe University, www.latrobe.edu.au

- <Sticky science: Why some bats sleep head-up>, NBC News, www.nbcnews.com

- <'바이러스의 저수지' 박쥐가 끄떡없이 진화한 비결>, 조홍섭 기자, 한겨레, 2020.01.30

이전 04화 바다거북의 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