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면 상태로 우주까지
한동안 달사냥꾼이라도 된 것처럼 매일 밤 달을 찾아다녔을 때가 있다. 저녁마다 산책과 러닝을 꾸준히 했던 시기였는데, 그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흐린 날을 빼곤) 늘 달이 보였다. 달을 볼 때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여기,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이 지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고작, 드넓은 우주 속 아주 작은 지구라는 행성일 뿐인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나의 괴로움이나 고민 따윈 좀 하찮게 느껴지곤 했다. 출구가 있다는 사실은 나를 다시 숨쉬게 했다. 그래, 지구는 유일한 곳이 아니야. 나는, 우리는 어디든 박차고 나갈 수 있어. 나가자마자 숨이 쉬어지지 않더라도, 우주의 먼지가 되어 유영하게 되더라도. 하지만 지구 탈출은 (당연히)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고, 나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 다음날을 위해 잠을 청할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설령 우주로, 달로 갈 기회가 생기더라도 그곳에선 숨도 제대로 못 쉴 게 뻔하다. 그러니 나는 지구 안에서 내가 몸 담고 있던 조직들을 박차고 나오는 걸로 대신했을 수밖에. (게다가 몇 번의 '지구 안 탈출'을 감행한 끝에 얻은 나의 결론은, 어디에 있든 중요한 건 결국 내 마음가짐과 태도였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음가짐과 태도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에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탈출을 하든, 무장을 하든.
곰벌레는 극한 조건에 처하면 탈출 대신 특별한 수면 상태로 온몸을 무장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들은 벌써 몇 번이나 우주를 여행했다.
곰벌레가 처음 우주에 갔던 때는 2007년. 그해 유럽우주국은 무인 우주선에 곰벌레를 태워 보냈으며, 이 생명체는 방사성 물질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채 무려 열흘을 버텼다.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 사실 곰벌레는 너무 조그맣기에 우주복을 입히기도 불가능해 보인다. 곰벌레의 몸집은 1mm 내외로, 펜으로 종이에 점 하나 딱 찍었을 때 정도의 크기다. 곰벌레를 검색하면 나오는 오동통한 몸은 현미경으로 기본 몇 백 배는 확대한 버전이다.
이후에도 곰벌레는 수차례 우주에 갈 기회가 생긴다. 2011년 11월엔 화성의 달 포보스까지 왕복하는 우주 탐사선에, 2019년 4월엔 달로 향하는 이스라엘 우주선에 탑승했다. 안타깝게도 포보스행 우주선은 지구로 재진입하다 불타버렸고, 이스라엘 우주선도 달 착륙에 실패하며 추락했다. 휴면 상태로 인조 호박에 몸을 담근 채 달로 향했던 곰벌레 수천 마리는 결국 우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곰벌레가 우주선에 거듭 실리는 이유는 그들의 미친 생명력 덕분이다. 몸집이 커봐야 1.5mm를 넘지 않는 그들은 작지만 막강하다. 우주와 같은 진공 상태는 물론 절대영도에 가까운 극저온(섭씨 -272.8도)에서도, 섭씨 151도의 고온에서도 살아남는다. 대부분의 동물이 목숨을 잃는 방사선 수치보다 몇 배는 더 높은 방사선도 견뎌낸다. 강력한 우주선(cosmic ray)이나 태양 복사선에 직접 노출되어도 문제 없다.
웬만한 압력에도 끄떡 없다! 지구상 가장 깊은 해저 밑바닥에서의 수압보다 6배 더 강한 압력이 가해져도 죽지 않는다.
* 최근엔 곰벌레가 고온에는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2020년,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의 리카르노 네베스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이들은 휴면 상태일 때에도 섭씨 82.7도에선 1시간 동안 밖에 생존하지 못했다. 24시간 버틸 수 있는 최고 온도는 섭씨 63.1도였다. 연구팀은 "흥미 위주의 과학 웹사이트들이 광고한 것처럼 곰벌레가 늘 막강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극한 상황에선 인간보다 훨씬 센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우주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맨 정신으론 버티기 힘든 극한 조건인데, 곰벌레는 어떻게 우주복 같은 안전 장치도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바로 곰벌레만의 특별한 휴면 상태에 있다. 곰벌레는 스트레스를 받는 극한의 환경에 처하면 '건면(Tun)'이라고 불리는 휴면 상태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수분을 거의 다 배출해 몸을 완전히 건조시킨 뒤 온몸의 세포막을 단단하게 만든다.
곰벌레의 평균 수명은 3달~2년 정도이지만, 이런 가사 상태로는 120년까지도 버틸 수 있다. 가사 상태가 되면 신진대사 활동도 0.05%까지 줄어든다. 거의 죽은 상태나 다름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물이 닿는 순간 다시 활성 상태로 돌아온다. 비나 눈이 내리거나, 이슬로 몸에 물기가 닿으면 부활하듯 되살아난다.
이런 놀라운 능력은 인간에게 많은 가능성을 시사한다. 곰벌레의 특별한 매커니즘을 파헤칠 수 있다면 냉동 인간 실험이나 우주에서의 생존 비결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곰벌레는 쉽게 그 비밀을 알려줄 것 같진 않다.)
곰벌레를 확대해 색을 입힌 이미지들을 보면 포대기에 쌓인 뚱뚱한 아기 같기도 하고, 통통한 아기 돼지 같기도 하다. 완보동물(tardigrade)에 속하는 곰벌레는 영어로 water bear(물곰) 혹은 moss piglet(이끼 돼지)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이들은 이끼에 사는 것을 좋아하고, 물속에서 수영도 매우 잘한다. 다만 움직임은 곰처럼 느릿느릿하다.
동그란 입에선 총알이라도 발사될 것 같은데, 잘 들여다보면 안쪽으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촘촘히 나 있다고 한다. 8개 다리 끝엔 기다란 발톱들도 보인다. 곰벌레는 이 발톱으로 물속 조류나 이끼를 뜯어 먹고 산다.
자꾸 보면 너무 못생겨서 귀엽기까지 하다. ‘못잘생김’의 느낌이랄까. 하지만 아쉽게도 몸집이 너무 작아 만질 수도, 안아줄 수도 없다. 그저 아래와 같은 이미지로 커다란 곰벌레를 상상해볼 수밖에.
* 참고 자료
-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 캐스파 헨더슨, 이한음 옮김, 은행나무, 2021
- <Tardigrades: 'Waterbears' stuck on the moon after crash>, BBC NEWS, 08 Aug 2019, www.bbc.com/news
- <Tardigrades>, American Scientist, www.americanscientist.org
- <지구 최강 생명체의 약점 밝혀져: ‘곰벌레’도 온난화 영향받을 가능성 있어>, The Science Times, 2020.01.30, www.science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