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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 Aug 05. 2023

기린의 잠

한번에 5분 이상 못 자요


기린을 기리는 날


‘Happy World Giraffe Day!’

얼마 전, 인스타그램 팔로잉을 하고 있는 미국의 한 사파리 계정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기린의 날을 축하한다고? 그런 날이 있나? 피드문과 함께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기린이 보였다. 목이 워낙 길어 전신이 한 컷에 담기지 못한 사진이었다.


(사진 출처: Thomson Safari instagram)


그날은 6월 21이었고, 이날은 정말 ‘세계 기린의 날’이었다! 알고 보니 2014년 국제 기린 보호 재단이 1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매년 6월 21일)를 기린의 날로 지정해 멸종 위기에 처한 기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린은 지구상에서 목이 가장 긴 동물이다. 하지만 잠은 가장 짧게 자는 동물에 속한다. 어느 정도로 숏 슬리퍼인가 하면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고작 1.5시간. 동물원에 사는 기린은 그보다 조금 더 자는데, 그래봤자 4.6시간이다. 거대한 몸집을 건사하려면 매일 10시간은 넘게 자야 할 것 같은데, 대체 어찌된 일일까?


* 참고로 다 큰 성체 기린의 키는 18피트(약 5.5m) 정도. 아기 기린의 키도 6피트(약 183cm) 정도로, 키가 큰 성인 남성과 맞먹는다. 몸무게는 어른 기린 기준 3000파운드(약 1360kg)까지도 나간다고 한다. 걷어 차이면 정말 그 자리에서 즉사할 듯.


아프리카 초원을 거니는 기린 가족. 오른쪽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자는 기린 모습 (사진 출처: Getty image / animalwised.com)


맘 편히 자는 건 기린에게 사치


기린이 하루에 겨우 한 시간 반 정도뿐 못 자게 된 건 야생 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다른 초식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린은 언제 어디서 덮쳐올지 모를 포식자들을 경계하느라 맘 놓고 잘 수 없다. 동물원 기린들이 야생 기린보다 조금 더 길게 잘 수 있는 건 안전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덕분이다. (다만 이는 기린의 케이스. 어떤 동물은 동물원의 통제된 환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더 못 자는 경우도 있다.)


물론 덩치가 워낙 크니 사자나 하이에나, 표범 같은 맹수들이 오면 길고 강한 뒷발로 휙 차버리면 그만일 거다. 그래도 맘 편히 누워 오랫동안 자는 건 위험하다. 땅 쪽에 머리를 뉘이면 목을 공격당해 질식당할 수 있기 때문. 특히 기린은 목도 워낙 길고 덩치도 크기에 적을 발견해도 재빨리 일어나기 힘들다. 누웠다 일어나는 데 소요되는 시간만 대략 15초다. 15초를 속으로 세어 보면 알겠지만 이는 적으로부터 달아나기엔 꽤나 긴 시간이다!


* 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굽히는 것 자체가 기린에겐 워낙 버거운 자세여서 물도 며칠에 한 번씩뿐 안 마신다. 3주 동안도 물 없이 버틸 수 있다. 그 대신 많은 시간을 선 채로 나뭇잎을 빨아먹으며 수분을 보충한다. 수분 함량이 높은 아카시아 잎은 기린이 제일 좋아하는 식물이다.


아카시아 잎을 찾아 기웃거리는 기린. 기린이 얼마나 크고 길쭉한 동물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진이다. (이미지 출처: Thomson Safari)


토막잠의 대가, 가끔은 누워서도 자요


안타까운 건 이 짧은 수면 시간도 통잠이 아니라는 사실. 기린은 <잠자는 동물들> 첫 번째 주인공 얼룩말이 그랬듯 선 채로 짧게 토막잠을 잔다. 한번의 토막잠은 고작 몇 분을 넘기지 못한다. 겨우 1-2분, 그보다 길면 5-30분 정도만 눈을 붙인다. 이렇게 다 합한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1.5시간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때론 몸을 웅크리고 앉아서도 잔다.  이때 비로소 깊은 잠(deep sleep) 단계에 접어들 수 있다고 한다.


앉아 쉬는 기린과 누워 자는 기린. 목을 굽혀 뒷다리에 기댄 채로 자고 있다. (사진 출처: Thomson Safari)


기린이 잠을 거의 못 자는 또 다른 이유는 깨어 있는 동안 할 일이 워낙 많아서기도 하다. 초식 동물이자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반추 동물인 기린은 거의 온종일 먹은 음식을 게워 내 되씹길 반복한다. (토막잠을 자면서도 입을 움직인다!) 필요한 칼로리를 모두 섭취한 뒤 소화시키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니 곤히 잘 시간이 좀처럼 나질 않는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서 기린을 보니 왠지 부쩍 더 나른하고 졸려보인다. 기린을 불안에 떨게 하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는 하루에 15-20시간까지도 자건만, 검푸른 긴 혀로 아카시아 잎이나 빨아 먹는 온순한 기린은 잠도 맘 놓고 못 자고 있다니. 물론 기린은 그 상태로 진화하고 적응해왔기에 짧은 수면 시간에 익숙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인간인 나는 오늘도 편안하고 안전하게, 그리고 기린보다는 꽤나 오랜 시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다. 비록 바깥 세상은 야생처럼 험악할지라도, 나의 침실은 잠시나마 아늑하기에.


오늘 밤도 모두 굿나잇할 수 있기를!



* 참고 자료

- <How Do Different Animals Sleep?>, Sleep Foundation, 03 Oct 2022, www.sleepfoundation.org

- <How does a giraffe sleep?>, Mirror, 17 Aug 2017, mirror.co.uk

- <11 Facts about Giraffes>, dosomething.org

- <Animals That Sleep the Least and the Most>, Discover, 14 Nov 2020, discovermagazine.com

- <Sleeping Habits: Why Do Giraffes Get Little Sleep?>, 31 Jan 2021, myanima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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