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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 Sep 19. 2023

곰의 잠

곰들이 다 겨울잠을 자는 건 아녜요


곰은 결코 미련하지 않다는 걸 일찍이 깨닫게 된 계기가 하나 있다. 오래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우연히 큰곰(Brown bear) 스페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였다.


그때 본 몇몇 장면들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특히 먹이를 취하는 장면들. 한번은 개미를 군것질(?)하는 모습이었다. 큰곰은 길고 가느다란 나무 막대 하나를 주워 꿀을 바른 뒤 개미 구멍에 찔러 넣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막대를 빼자 꿀에 정신이 팔린 개미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 있었다. 큰곰은 여유롭게 막대에 붙은 개미들을 호로록, 한번에 핥아 먹었다!


개미 서식지를 찾아 나무 조각을 뒤지는 흑곰 (사진 출처: bear.org)


곰은 결코 미련하지 않다


사실 그보다 더 놀란 장면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연어를 사냥하는 순간이었다. 큰곰은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습성을 이용해 역으로 튀어오르는 방향에 맞춰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곧 연어 한 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곰의 입 속으로 뛰어들었다. 곰은 날카로운 이빨로 연어를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주황빛 연어 알이 폭죽처럼 사방으로 터져나갔는데, 세상에, 그 장면은 내게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했다. 잔인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순간이었달까.


강물을 거슬러오르는 연어를 기다렸다 덥썩 무는 큰곰 (사진 출처: Guardian)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이토록 영리하게 사냥하는 곰이건만, '미련 곰탱이 같다'는 표현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큰 몸집으로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게을러 보였을까. 아니면 겨울만 되면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잠만 자는 게 미련해 보이기라도 했을까.



겨울잠, 곰이 택한 최선의 생존전략


그 무책임한 비유는 정말이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곰이 겨울에 작정하고 긴 잠을 청하는 건 그들 나름의 똑똑한 생존 전략이다.


곰은 사람처럼 일정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항온동물이다. 겨울에 괜히 배고파서 어슬렁거리다가는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그러니 가을 동안 열심히 먹고 살을 찌워 지방층을 두텁게 한 뒤, 안전한 장소로 피신해 오랜 잠을 청한다.


* 참고로 서울대공원에 사는 반달가슴곰은 겨울잠을 안 잔다고 한다. 사육사가 알아서 음식을 챙겨다 주기 때문. 이들은 길게 자면서 에너지 비축을 할 필요가 굳이 없다.


동면 중 곰들은 음식을 먹지도, 배설을 하지도 않는다. 신진대사율과 심장박동수가 평소의 4분의 1가량 줄어든다. 이 기간은 말하자면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는 시간이다.


가슴에 V자 무늬가 돋보이는 반달가슴곰. 오른쪽은 나무굴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던 새끼 반달가슴곰이 잠깐 눈을 뜬 모습 (사진 출처: 나무위키 / 경향신문)


동면 기간 출산까지 하는 반달가슴곰


사실 동면 기간 곰들은 완전히 푹 자는 것만은 또 아니다. 특히 반달가슴곰은 겨울잠을 잘 동안 출산까지 한다.


반달가슴곰은 11월 말경부터 이듬해 2월까지 겨울잠을 잔다. 안전한 나무굴이나 바위굴 안에서 긴 잠을 자다 깨어나기 한두 달 전(1-2월) 출산을 한다.


반달가슴곰 암컷은 5-7월경 여러 수컷과 짝짓기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수정란을 자궁 안에 보관하다 동면 직전 착상시킨다. 임신 기간은 2-3개월 정도. 짝짓기 후 곧바로 수정란을 착상시키지 않기에 겨울잠에 들어갈 즈음 임신 기간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가을이 되면 충분히 먹어두고 에너지를 비축하며 겨울잠과 출산 준비를 함께 하게 된다.



판다 “겨울잠이 뭐예요?”


곰이라고 다 겨울잠을 자는 건 아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반달가슴곰도 동물원서 편안히 지내는 친구들은 겨울잠을 안 잔다. 특히 자이언트 판다는 야생에 있든, 동물원에 있든 원래 겨울잠을 안 자는 곰이다.


대나무를 피리처럼 쥔 채 이빨로 씹고 있는 판다(푸바오 아님!) (사진 출처: National Geographic Kids)


판다가 겨울잠을 안 자는 이유는 깨어 있는 동안 열심히 먹어야 하기 때문. 대나무숲이 울창한 중국 산악 지역이 주 서식지인 판다는 육식동물임에도 대나무를 주식으로 먹으며 초식에 가까운 동물로 적응해왔다. 문제는 엄청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대나무를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


판다들은 반나절만에 평균 10킬로 정도의 대나무를 먹는다. 대나무는 단백질도 적고 영양가나 칼로리가 상대적으로 낮기에 에너지를 유지하려면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판다는 하루에 10시간 넘도록 대나무를 씹으며 뒹굴거린다. 나머지 시간은, 잔다! 실제로 에버랜드 푸바오를 보기 위해 열심히 티켓 예매까지 해서 찾아간 사람들 중 실망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 “기껏 시간 내서 엄청 기대하고 갔는데 뒤돌아 누워선 잠만 자고 있는 거예요.”


어렸을 적 푸바오 (사진 출처: 에버랜드)


이렇게 매일 잠이 많은 판다지만, 느릿느릿 뒹굴뒹굴 게을러 보일 수도 있겠지만, 판다는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럽다. 오래도록 긴 잠을 자는 다른 곰들도 소중하고 귀하다. 조용하고도 신비로운 생존 전략을 알아서 잘 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이런 곰들에게 미련 곰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잠자는 뒷모습만 보고 오는 한이 있더라도 올해 꼭 푸바오를 보러 가고프다. 아마도 겨울 즈음? 푸바오는 겨울잠을 안 잘 테니 깨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 참고 자료

- <겨울을 나는 지혜, 동물들의 겨울잠>, YTN 사이언스, 2017.11.22, science.ytn.co.kr

- <America black bear>, Wikipedia, wikipedia.org

- <How pandas survive on their bamboo-only diet>, Science, science.org

- <겨울잠 반달곰 깨우지 마세요, ‘죽어요’>, MBC News, 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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